제2회 남명문학상 심사 결과 수필 부문 최우수상 장철호

공모전

제2회 남명문학상 심사 결과 수필 부문 최우수상 장철호

소하 0 250

a69eccfe4a6c31ce1c1b734890f9d20d_1629364546_82.png

제2회 남명문학상 수필 부문 최우수 장철호 수필가

 

사당에서 피는 향기


 장철호

 

타오르는 여름의 끝자락, 고향 시골 마을의 종갓집 사당으로 향했다.

작은 강의 지류가 큰 강과 만나는 곳, ()를 끼고 자리 잡은 깡촌 마을이다.

작년 폭우 때 강변 둑이 무너져 근처에 있는 가옥들은 모두 수몰되고 부서졌다.

어머니의 시골집도 마찬가지였다. 비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곳은 그야말로 초토화되어서

아직도 회복하지 못한 곳들이 군데군데 보였다. 어렴풋이 보이는 사당의 꼭대기에

시선이 집중되기보다 정글과 같은 무성한 덤불에 살짝 기가 눌렸다. 그동안 무럭무럭 잘도 자랐구나.

요즘은 잡초제거 대행 서비스나 약을 뿌리면 한 번에 해결될 문제지만 어머니는 애써 낫질을 자처하신다.

윗대부터 해 내려오던 전통을 깨뜨리기 싫은 것도 있겠지만 사당에 대한 예의의 표시이기도 했다.


내가 낫질을 해서 길을 틀 테니 천천히 따라 오이라

몇십 년의 노하우를 지닌 어머니의 지시는 꼭 따라야 한다.

수풀 사이는 꽈리를 튼 뱀들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어서 특유의 뱀 쫓는 기술을 연마하신

어머니의 특별한 지휘가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든든한 수장이 있어서 얼마나 안심이 되는지 모른다.

백발이 성성하고 관절염에 약을 달고 사시는 나이가 되셨지만 패기는 여전하신 분이다.

이곳에서만큼은 자신이 최고 베테랑이라고 생각하시니 힘이 절로 생겨나는가 보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싶어서일까? 바쁜데 한사코 안 와도 된다는

어머니의 말류에도 매년 이곳을 같이 오는 것도 같다.


사각사각 노련한 낫질 소리가 시원하게 들려오면 웃자란 갈대와 풀들이

일차적으로 쓰러지고 통로 같은 길이 확보가 된다. 나는 통로를 따라서

사당의 오른편을 맡아서 풀들을 제거해 나가기 시작했다.

처음 눈앞에 보였던 삐쭉한 풀들 속에서는 겹겹이 얽힌 환삼덩굴과

가시덤불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더 고된 앞날을 예고했다.


그래도 질 수 없다는 오기가 생기면서 묵묵히 잡초를 제거하다 보면 힘겹게 버티면서

도움을 바라는 수국 무리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럴 때면 숨겨둔 보물이라도 찾은 듯

소소한 재미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허리를 굽혀 정신없이 낫질을 하다 보니 다리

아래쪽부터 등허리까지 통증이 밀려왔다. 이때쯤 허리를 한 번 들어줘야 하기에

하늘을 향해 쭉 일어나보면 어머니는 여전히 허리 한번 펴지 않고 길을 재촉하고 계신다.

종갓집의 맏며느리로 30년을 넘게 사셨으니 이런 고역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낫질은 거침이 없다.

홍수가 지나가고 난 자리는 사람에게는 고역의 장이지만 잡초들에는 한없이 성장할 기회이기도 하다.

 

수풀을 헤치다가 어머니와 가까워 짐을 느끼는 순간, 오래된 노랫가락이 들려온다.

마치 구식 라디오에서 지지직거리며 나오던 클래식 느낌이랄까? 어머니의 노동요는 변함이 없다.

구성진 가락은 잠시나마 옛 시절로 나를 데려다주었다. 초등학교 시절, 30년도 더 지난 일인데도

또렷이 기억이 난다. 그때는 강변에 제대로 된 제방이 있지 않아서 지금처럼 조금만 비가 내리면

둑이 넘쳐 집안까지 비가 들어오기 일쑤였다. 온 가족이 바가지로 물을 퍼내면서 젖은 옷가지와

책들을 말리던 기억이 새록새록 났다. 새로 산 운동화가 젖었다고 연신 울어대던 막내의

울음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아른거린다. 세월이 흐르면서 제방 공사가 이루어지면서 마을도

점점 지금의 모습으로 변해갔지만, 이번과 같이 물이 넘쳐 마을이 황폐해진 적은

몇십 년 만의 희귀한 일이 된 셈이다.


내가 좀 힘들어도 이래 해놔야 다음 사람이 편한기라

언제 오셨는지 어머니의 시원한 외침에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어머니의 말씀은 마치 앞선 사람의 채찍질 같았다. 낫을 잡고 먼저 길을 냈듯이

후손들이 잘 따라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녹아있었다. 해가 서쪽으로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

몸은 어느새 땀으로 범벅이 되었고 잡초의 냄새로 뒤섞여 갔다.

빗방울이 한두 방울씩 내리기 시작할 때쯤 사당 앞의 마당은 말간 모습을 드러냈다.

그제야 이 사당의 주인들이 떠올랐다. 조상의 위패를 닦고 모시던 그 숭고한 손길들,

기둥 하나하나에 서린 정성들을 느낄 수 있었다. 배움을 위해 한평생을 바치신 분들,

후진 양성과 한자 서적들을 한글로 해석하시는 데 일생을 보내신 분들,

사당의 앞날을 묵묵히 지켜 오신 나의 선조 님들이셨다. 우리보다 훨씬 더 앞선 분들인

당신들께서 조상의 위패를 닦고 모시던 그 절절한 마음들이 향과 함께 번져 나오는 듯했고,

마당의 나뭇가지는 조부께서 쉬실 때 피우시던 곰방대 같아 보이기도 했다.

밀림같이 우거진 수풀에 가려 미처 보지 못했던 장면들이 일을 정리한 다음에야 보이기 시작했다.

조금씩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새로운 풍경으로 피어났다.

공부한다는 핑계로 한 번도 와보지 못한 아이들과 함께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번뜩 스쳤다.

낙동강을 끼고 힘겹게 살아온 할머니와 아버지의 흔적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먼저 앞서 나간 발자국들을 보면서 땀의 참된 의미를 느껴보는 것도 의미가 있으리라.

지금의 땀 냄새는 결국 한 세대가

다른 세대를 위해 선물하는 짭짤하고 단내나는 향기가 분명할 테니.


▣당선 소감문▣

아름다운 인연의 고리를 영속하는 매개체가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줄의 글이 시공간을 넘어 사람과의 관계를 선하게 맺듯,

낙동강을 끼고 고되게 살아오신 어머니의 이야기로 고리가 연결되니 한없이 기쁩니다.

"경으로 마음을 닦고 의로써 실천하라"

성성하게 깨어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후학 양성에 힘써 훗날을 대비했던 남명의 깊은 뜻을 흠모하게 되었습니다.

후손들이 더욱 미래를 아름답게 느끼고

 현재를 성실하게 살아가는 데 힘이 되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제 인생에 또하나의 행복을 쌓았습니다.

좋은 상을 주신 남명 문학 관계자 모든 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