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동행 * 포랜컬쳐 신춘문예 * 이 달의 수필 * 책 사랑 도서원 * 김정권 작가
포랜컬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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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2 06:40

#대상
#수필 부문
책 사랑 도서원
김정권 시인 수필가
어릴 적 소원 중 하나는 나만의 공간을 갖는 것이었다. 당시 우리 집은 본채와 사랑채가 있었다. 집안 형편상 세를 주고 사랑채 한 칸은 큰형의 공부방이었다. 그 방은 대학교에 다니는 형의 책으로 가득 차 있었다. 형이 외출하면 나는 그 방에 들어가 하루 종일 책을 읽곤 했다.
우리 집 사랑채에는 마을의 대학생들이 자주 모였다. 그 덕분에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듣고, 고등학생들이 접하기 어려운 책들을 읽으면서 내 또래들과는 다른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미래의 나의 삶이 자연스럽게 결정되었다. 무엇보다 세월이 지나도 사랑채 방에서 책을 보던 향수와 함께 남다른 책 욕심을 가지게 되었다.
책을 좋아하면서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친구들과의 약속장소도 영광도서나 교보문고 능력서점 등으로 정했다. 친구를 기다리는 동안에 책을 보면 지루하지 않았고, 책 속에 빠져들어 주인 몰래 메모도 했다. 약속 시간에 늦게 오는 친구가 오히려 고마울 때도 있었다. 보수동 헌책 골목에라도 가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를 만큼 그곳은 무릉도원이었다. 살아가면서 감내하기 어려운 오해나 억울함을 겪을 때는 선현들은 어떻게 해결하였는가 생각 하며 서점에서 한 나절을 보냈다. 책 속에 길이 있는 것처럼 책을 읽으면 평상심이 되살아났다.
30대 초반이 되었을 때 내가 사는 마을에 아파트와 주택이 늘어났다. 주민들이 좋은 책을 좀 읽고 잘 정착하길 바라는 마음이 생겼다. 당시 김해에는 도립 도서관이 하나뿐이었다. 좁은 집안에 책이 많아 마을 도서관을 설립해 주민들에게 독서 환경을 만들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주민들이 책을 많이 읽기를 바라며 가까이하기를 바라면서 소장한 책과 신간 도서를 구입해 책사랑 도서원을 설립했다. 건강한 사회를 위한 시민모임 (건사회) 임원들이 함께하면서 각종 모임이 활성화 되었다. 도서원을 찾는 주민들이 건사회 회원이 되면서 모임도 활력이 되었고 도서원도 확장이 되었다. 그때는 책에서 풍기는 종이 냄새조차 좋았다. 새 책을 구입하면 남아 있는 기름 냄새를 코로 빨아 들었다. 오래된 책에 남아있는 곰팡이 냄새도 나에게는 향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연말 행사나 각종 시상식에서의 상품도 도서 상품권으로 하였고 새해 선물도 책으로 대신했다.
그런 문화 활동을 하고 있을 때 삼방동 대동 아파트 뒤편 공원에 칠암도서관이 세워졌다. 칠산 출신으로 김해에서 사업을 키운 사주가 문화센터건립을 위한 재정을 기부하겠다는 유언이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토지 구입비를 절감하고 도서관 중심의 문화센터를 제대로 건립하기로 했다. 공사가 시작되자 대동 아파트 주민들이 소음과 분진 등으로 공사를 반대하여 도서관 건립이 난관에 봉착해 버렸다. 지역에서 사업을 번창한 건실한 기업인이 세상을 떠나면서 지역 인재 양성에 기여하겠다는 숭고한 뜻이 무너질 위기였다.
도서관 건립을 반대하는 주민들이 답답하기도 했다. 공장이나 영업장이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책을 쉽고 마음것 볼 수 있는 사업에 반대하는 아파트 주민 중에는 모임을 함께하는 분들도 있었다. 주민대표도 그 중 한 분이었다. 반대하는 아파트 주민들을 모아 달라는 부탁에 반대하는 주민들이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모였다. 모인 사람들 중에는 친분이 있는 사람도 있어 먼저 그들의 입장을 어느 정도 이해한다는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도서관 건립과정에서 터파기와 대형 트럭의 운행으로 먼지와 소음이 발생하여 고통이 많은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공사 기간의 불편을 참아내고 문화센터와 도서관이 완공되면 누가 가장 많이 이용하고 편리하겠느냐, 또 아파트 가격은 어떻게 될까, 공사 후ㅌ 주민들이 선정한 업체를 통해 아파트 하자 진단을 해서 공사로 인한 하자가 생겼다면 내가 먼저 삭발하고 보상 요구에 나서겠다며 주민들에게 불편한 공사과정 그 이후의 상황을 설명하고 그곳에서 나왔다. 다음날 주민대표가 치열한 찬반 토론 끝에 공사를 허용하기로 결론이 났다고 알려주었다. 공사가 끝난 후 동아대 지질 연구소의 안전 진단 결과 문제가 없어 아파트 전체 도색으로 마무리되었다. 대규모 도서관이 들어서자 아쉬움보다 기쁜 마음으로 2천여 권의 책을 칠암도서관에 기부하고 도서원은 문을 닫았다.
책을 좋아하고 책 욕심이 많았던 시절이 사라졌다. 우리 집에 있는 책은 장식용이 되고 폐기 처분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책 욕심을 부리던 습관은 아직 남아 지금도 책을 집으로 가져온다. 지인의 사무실이나 집을 방문하면 책장에 눈이 먼저 간다. 하지만 정작 밤을 새우며 책과 씨름하거나 책에서 답과 길을 찾는 일은 갈수록 드물어진다. 이제는 책보다 유튜브나 네이버에서 필요한 것을 찾는 습관이 생겼다. 잠시라도 스마트폰이 없으면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환자가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스마트폰이 종이책을 대신해 주고 있다. 필요한 신간 서적 자료를 곧 찾아야 하거나 도서관이 멀어 가 볼 수 없을 땐 유튜버가 대신해 준다. 그래도 형이 외출했을 때 몰래 들어가 책을 읽던 그때가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