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용국 수필가의 최신간, 걷기 여행 이야기-흔들릴 때면 경춘선을 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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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용국 수필가의 최신간, 걷기 여행 이야기-흔들릴 때면 경춘선을 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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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행동.인문학특강


민중의 소망이 빚어낸 황금알 같은 시어

- 서울 북한산성행


  일기예보에서 온다던 비는 안 오고 잔뜩 흐리기만 합니다. 미세먼지도 여전히 부동자세입니다.

어서 비가 와야 이 못된 놈의 심술보를 터트릴 수 있을 텐데...

언제부터인가 새봄의 노트에는 꽃과 새순의 싱그러운 이미지보다 미세먼지 얘기가 더 많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비 온 후 맑고 깨끗한 북한산의 준봉을 보고 싶습니다. 북한산도 비가 그리운 봄날입니다.


  대서문을 지나갑니다. 이 문이 북한산성의 정문입니다. 조선 시대 숙종(재위 38년, 1712년)도 이 문을 통해 산성에 행차했습니다.

북한산성의 16개 성문 중에서 가장 낮은 지점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성내에 마을이 있었습니다.

마을 주민은 이 문을 통하여 세상과 교류했습니다. 성마루에 오르니 도시로 뻗어 내린 북한산 줄기 끝자락에서

미세먼지에 포박당한 고양시의 높은 빌딩들이 우울하게 서 있습니다. 어두운 사진 한 컷입니다.

  북한산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산행의 맛은 햇빛 맑은 봄날 바위를 스치며 경쾌하게 떨어지는 새하얀

물소리와 새순을 흔드는 싱그러운 연초록 바람 소리를 들으며 걷는 환희인데, 언제부터인가 그 맛이 사라졌습니다.

 이제 아름다운 신록의 나라를 영영 잃고 마는 것인가?


  무량사를 지나갑니다. 의상봉 아래에서 원효봉을 바라보고 있는 사찰입니다.

이 절은 고종의 후궁 순빈 엄씨가 산신각을 지은 뒤 약사불좌상과 산신탱화를 모시고

백일기도를 올려 영친왕 이은을 낳았다고 알려지면서,

백일기도를 올리면 소원을 들어주는 사찰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중성문을 지나갑니다. 중성문은 노적봉과 증취봉 사이에 쌓은 중성의 대문입니다.

대서문이 지대가 낮아 방어에 취약하니, 이에 대비하여 이중 방어를 위해 쌓은 차단성입니다.

이 문에 들어서야 비로소 조선 시대 행궁지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중성문 망루에 올라서면 늠름한 자태를 뽐내는 건장한 노적봉을 제대로 한 컷에 담을 수 있습니다.

저 하얀 봉우리가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흰 구름 고깔을 쓴 멋진 모습을 언제나 볼 수 있으려나.

  산영루에 왔습니다. 산영루는 아름다운 북한산의 모습이 물가에 비친다고 하여 붙인 이름입니다.

산영루의 축성 시기는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중기 1603년에 문인 이정규의『유삼각산기』에

'산영루 옛터로 내려왔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북한산성이 축성(1711년) 되기 이전부터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맑고 멋진 산수가 있으니 어찌 문인들이 찾지 않을 수 있었으랴.

옛 선비들은 이곳에 찾아와 시문을 지으며 풍류를 즐겼다고 합니다.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도 이곳을 방문하여 시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행궁지를 스치듯 무심히 지나갑니다. 행궁지는 복원 공사 중에 있지만 황량하기만 합니다.

조선 시대 양란(임진왜란, 병자호란)의 참사와 치욕을 겪고, 사직을 보전하기 위하여 산성을 쌓았습니다.

행궁과 관청과 군사시설도 마련하였습니다.

북한산의 수려하고 기상 넘치는 봉우리를 연결한 11.6km의 돌로 쌓은 산성은 난공불락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한 번도 이 천혜의 요새를 활용해보지 못하고 무너졌습니다.

견고한 이 산성을 어찌 감히 외부에서 넘볼 수 있으랴.

안으로 썩을 대로 썩은 조선의 위정자들은 이를 지켜낼 최소한의 능력도 의지도 없었습니다.

행궁지는 잡초만 무성하고, 그 옆을 지나가는 산객들 또한 그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민중을 지켜내지 못 하고, 민중 위에서 군림하고,

민중을 기만했던 잡 세력들의 초라한 말로의 모습 같아 쓸쓸함만 더할 뿐입니다.

  청수동암문에 왔습니다. 나월봉과 문수봉 사이의 고갯마루에 있는 바위문입니다.

북한산성에는 8개의 암문이 있습니다.

청수동암문은 탕춘대성과 비봉에서 산성으로 들어오는 길목을 통제하기 위해 설치했습니다.

이 암문에서 문수봉을 넘으면 대남문입니다.

암문은 비상시에 병기나 식량을 반입하는 통로이자 비상출입구입니다.

 그러니까 청수동암문은 대남문의 비상구인 셈입니다.


  대남문으로 나와 구기계곡으로 하산합니다. 북한산에는 소나무가 참 많습니다.

큰 바위가 많은 북한산에서 소나무는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의연하게 살아갑니다.

소나무도 매년 새순을 피우고 가을이면 금빛 솔잎으로 지곤 합니다. 소나무는 원래 솔나무라 불렀습니다.

솔은 으뜸이란 뜻입니다. 나무 중에서 최고란 말입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옛 사람들은 소나무의 송진으로 등불을 밝혀 책을 읽고 바느질을 했습니다.

솔잎으로 송편과 술을 빚어 먹기도 했습니다. 소나무로 지게를 만들어 땔감을 장만하고 짐을 날았습니다.

기근이 심해 먹을 것이 없을 때는 소나무 껍질로 끼니를 때웠습니다. 그리고 죽어서는 소나무관에 묻혔습니다.

소나무는 처음부터 끝까지 민중의 삶을 지키며 함께했습니다.

  척박한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혹독한 시련을 이겨내며 강인하게 삶을 이어가는 소나무는 민중의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민중이 바라보는 이런 소나무의 줄기 색깔은 황소색입니다. 우직하게 민중과 함께한 황소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민중은 나무 중에 으뜸인 솔나무에서 살아가는데 으뜸인 소를 보았습니다.

솔나무가 소나무라 불리게 된 것은 민중의 소망이 빚어낸 황금알 같은 시어입니다.

그것을 찾아 오늘도 내일도 걷고 또 걸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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