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권의 의령 이야기 5, 의령의 아들이 민족의 혼을 지켜내다.
2019년 1월 개봉한 영화 <말모이>는 일제강점기 조선어학회 사건
이 배경이다. <말모이>는 1910년대 주시경 선생과 선생의 제자들이
조선광문회에 참여하여 편찬을 시도한 최초의 현대적 우리말 사전 원
고다. 당시에는 일제의 극심한 탄압으로 인해 출판에 이르지 못했으
나 이후 조선어학회를 거쳐 1947년 마침내 우리나라 최초의 국어사전
인 <조선말 큰사전>이 나오는 밑거름이 되었다.
영화에서 배우 윤계상이 연기한 류정환의 실재 인물은 한글학자이
자 독립운동가인 이극로 박사다. 그는 1893년 의령군 지정면 두곡리
에서 태어났다. 예전에는 듬실마을이라 했는데 전의이씨(全義李氏)
집성촌이었다.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듬실마을은 산줄기가 성벽처럼
둘러싸고 있는 산간지역이라 살림이 팍팍했고 이극로의 집안 또한 가
난한 농가였다. (실제 두곡리 주변으로는 매봉산, 두목산, 말덤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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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골, 탑골, 점뒤, 서재골, 골안 등 산과 골짜기 지명이 유독 많다.) 농
사일을 도우며 두남재(斗南齎)에서 한학을 배운 그는 공부를 위해 17
세의 나이에 무단가출하여 마산 창신학교에 입학했다. 가난도 가난이
었지만 부모가 반대하는 신식 공부를 하겠다고 나간 아들에게 집에
서는 한 푼도 지원을 하지 않았고 그는 은단을 팔아 고학을 하며 남
하 이승규(노산 이은상의 아버지) 집에서 식객으로 지내기도 했다. 이
시기에 그는 항상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살았는데 이승규가 그 까닭을
묻자“저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주먹을 펴면 아무것도 남
는 게 없습니다.”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창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1913년 중국 서간도로 가서 항일 애국지사들과 교류하며 민족 종교인
대종교에 입교하고 부설학교인 동창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16년
두 살 위 고향 선배인 남저 이우식의 후원으로 중국 상해 동제대학 예
과에 입학하여 1920년 졸업을 한 그는 오랜 꿈이었던 독일 유학의 꿈
을 안고 1921년 베를린으로 향한다. 그의 회고록 <고투 40년>을 보면
1921년 6월 프랑스 선적 배를 타고 출발하여 이듬해 1월 베를린에 도
착한 것으로 나온다. 무려 반년이 넘는 유학길을 보면 북경-홍콩-베
트남-수에즈운하-포트사이트-카이로-알렉산드리아-시칠리아-나폴
리-로마-밀라노-베른-제네바-베를린으로 이어진다. 배를 타고 기차
를 타고 지구 반 바퀴를 돌아 베를린에 도착한 그는 1922년 8월 29살
의 나이에 베를린대학 철학부에 입학하여 마침내 독일 유학의 꿈을
이룬다. 100년 전 베를린으로 가는 길은 어땠을까? 상상으로도 닿지
않는 그 먼 길을 그는 오직 꿈 하나로 건너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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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영국 런던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수
학한 후 1929년 마침내 고국으로 돌아와 조선어연구회에 가입한 그는
회원들에게 지금 우리가 민족 어문을 통일하고 사전을 편찬하는 사업
을 하지 않으면 우리 민족은 멸망하고 만다고 설득하여 <조선어사전
편찬위원회>를 결성하고 간사장을 맡았다. 베를린대학 유학 시절 조
선어과를 창설하여 3년 동안 무보수로 독일 학생들에게 우리말을 가
르쳤는데 당시 학생들이 선생의 나라에는 국어사전도 하나 없느냐는
핀잔에 큰 창피를 느끼고 귀국하면 반드시 우리말 사전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조선어문을 정리 통일하여 보급
함으로써 고유문화의 수준을 향상시키고 민족의식을 앙양하여 독립
을 위한 실력을 키우고자 했다.
그러나 1930년대 중반부터 일제는 내선일체를 내세우며 우리말과
글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1938년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여 조선어 과목
을 폐지하고 학교 안에서의 우리말 사용을 금지했다. 이들에게 조선
어학회는 그야말로 눈엣가시였다. 1942년 일제는 조선어학회가 민족
주의 단체로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치안유지법의 내란죄
를 적용하여 10월 1일 이윤재, 최현배, 장지영, 이극로 등 핵심 인사부
터 구속하기 시작하여 모두 33명이 검거되었다. 여기서 이극로는 징
역 6년형, 최현배는 4년형을 선고받았고 이윤재와 한징은 모진 고문
으로 인해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광복 후 출소한 그는 재건된 조선어
학회 회장에 취임하여 다시 한글연구를 이끌었고 1946년 건민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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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을 지내면서도 한글연구와 교육활동을 계속했다.
나는 청년시절부터 한글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김해에서 민청 활
동을 할 때도 김해 출신 한글학자인 한뫼 이윤재 선생과 눈뫼 허웅 선
생의 현양사업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 노력들이 모여 현재 김
해에는 다양한 한글문화 사업이 활발하고 한글문화복합공간인 김해
한글박물관도 문을 열었다. 의령에서도 고향 출신의 한글학자와 독립
운동가에 대한 현양사업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후손의 마
땅한 도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나 남북 분단 이후 북행
의 이력 때문에 민족 어문의 표준화와 사전 편찬에 공헌한 이극로 박
사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유보되어 있는 안타까운 현실을 고려한다면
고향 후학들의 더 큰 노력이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다.
고루 이극로박사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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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극로의 일생에는 고향 선배인 남저 이우식의 후원이 늘 함께 했
다. 이우식의 후원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극로가 남긴 수많은 성과를
만나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다음 기회에는 남저 이우식의 발자취를
함께 따라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