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권의 의령 이야기 3, 솥바위 전설과 재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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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권의 의령 이야기 3, 솥바위 전설과 재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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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권 수필가


의령의 부자들과 석학들은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이 남달랐다. 일제 강점기의 백산 안희제와 남저 이우식 선생께서 늘 의령의 인재들에게 학자금과 유학 비용 등 인물에 투자하는 것을 아끼지 않았듯이 정곡 면의 이병철 삼성회장과 화정면 출신의 남상철 (상공부 고위직 퇴직 후 기업인)은 서울로 유학 온 의령인들에게 학자금 등을 지원하며 고 향을 잊지 않았다. 전원용(성균관대학 졸업) 초대 민선 군수 등 의령 학우들이 면면히 이어온 선각자들의 고향 사랑의 혜택을 받아왔다. 이병철 회장은 의령에 직접 내려와 의령여중에서 제일모직 등에 취업 을 희망하는 사람들을 채용하여 이들의 월급은 가족들 건사와 학업 그리고 생계에 보탬을 주었다. 생활하는데 일조하였다. 추석이나 설 에는 귀향하는 사람들로 관광버스가 줄을 잇기도 했다. 남상철 씨는 의령에 올 때 서울에서 진주로 진주에서 화정으로 버스를 타고 왔는 데 어느 날 진주에서 서울 가는 버스를 버스를 기다리다가 땀 흘러 일 1부 김정권의 의령이야기_25 하는 두 형제를 보고 넓은 곳에서 일할 수 있도록 보증서를 써주어 오 늘날 대동 공업사 창립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허삼석 전 의령군 읍장 의 증언이다. (허삼석 전 읍장은 국회의원 시절 고향 대의면에 인사차 왔을 때 대의면 면장으로 근무하셨고 그때 인사를 드렸고 최근에 몇 번 뵌 적이 있다.) 이렇듯 의령은 부자도 많고 부자의 전설도 많이 안고 있다. 지금이 야 다소 시들해졌지만 한때는 전국의 유명 관광코스 중에 하나로 꼽 히며 너도 나도 부자의 기를 받겠다고 의령을 찾았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의령 솥바위의 전설처럼 의령 정곡면에서 삼성 이병철 회장이, 진주 지수면에서 금성 구인회 회장이, 함안 군북면에서 효성 조홍제 의령 부자 솥바위 일출 26_김정권의 의령이야기 회장이 태어났다. 정암(鼎巖)을 가운데 두고 반경 20여 리 안에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재벌기업의 창업주 세 명이 태어난 것이다. 세종실록지리지 경상도 편을 보면“대천(大川)이 세 개니, 첫째가 낙동강이고 둘째는 남강이라, 그 근원이 둘이니 하나는 지리산 북쪽 에서 나오고 하나는 지리산 남쪽에서 나와서 진주 서편에서 합류하여 광탄(廣灘)이 되고 의령에 이르러 정암진(定巖津)이 되어 동쪽으로 흘러 기음강으로 들어간다. 셋째가 초계 황둔진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남강(南江)은 함양, 산청, 진주를 거쳐 의령으로 넘어온다. 이름도 제각각이어서 함양, 산청 물은 경호강이요, 진주는 남강, 의령은 정강 (鼎江)이라 부르는데 의령에 이르러 부자상(富者相)의 콧방울 같은 솥 바위, 정암(鼎巖)을 떨궜다. 정암은 다리 세 개 달린 바위가 반쯤 물속에 잠겨있는 모습이 솥과 같다 하여 붙은 이름이니 솥바위의 뜻을 충실히 옮긴 훈차자(訓借字) 라 할 것이다. 실제로 고지도에는 정암을 다리가 셋 있는 모양의 솥으 로 그리기도 했다. 솥이라는 게 곡식과 재물을 상징하는 것이어서 정 암을 품고 있는 의령은 식복을 타고난 셈이고 그래서 이름도 형편 좋 고(宜) 편안한(寧) 땅, 의령일 것이다. 1부 김정권의 의령이야기_27 정암나루는 1935년 정암철교가 놓이기 전까지는 남강의 수십 개 나 루 중에서도 가장 큰 나루였으며 경남의 중서부 지역으로 연결되는 요지이자 의령의 관문 역할을 했던 곳으로 나루터 근처는 민물횟집과 주막이 즐비했다. 임진왜란 때는 곽재우 장군이 최초로 의병을 일으 켜 남강을 거슬러 전라도 곡창 지대로 들어가려는 왜군을 맞아 대승 을 거둔 곳이기도 하다. 정암 이야기를 하다 보니 곡식과 재물의 상징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경남에서 가장 군세가 작고 초라한(?) 의령의 현실에 씁쓸하기도 하지 만 언젠가 이름과 상징에 어울리는 의령의 모습을 갖추게 되지 않을 까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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