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권의 의령 이야기 1, 오래된 미래의 고장 의령
김정권 수필가
의령은 경남의 한가운데 있다. 북쪽에 합천, 서쪽에 산청, 남쪽에
진주, 동쪽에 함안과 창녕이 붙어 있고 남북으로 낙동강, 동서로 남강이
지나간다. 물이 사방으로 흐르고 있는 의령은 동서남북 경남의 어느
외진 곳이라도 한 시간 안에 가닿지 못할 곳이 없다. 지리적으로만 본
다면 경남의 수부 도시는 의령이 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일 터인데 불
행히도 의령은 경남의 18개 기초자치단체 가운데 인구수가 가장 적고
소외된 것이 현실이다. 인구는 3만 명 아래로 떨어진 지 오래고 지금
은 2만 7천 명에도 미치지 못한다. 세대 당 인구수는 간신히 1.7명을
넘어 전국 평균 2.45명에는 한참 모자란다. 젊은이들은 대부분 타지
로 떠나고 나이 드신 어르신들이 충절의 고장 의령을 지키고 있는 셈
이다. 그러나 세상의 속도와 반비례하여 느리게 흘러가는 의령의 시
간이 속도로 인해 놓치고 사는 많은 것들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어 의
식불명의 것들을 우리의 의식 속에 새롭게 탄생하는 순간을 마주하는
것은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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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하릴없이 장터 구경에 나섰다. 의령장은 3일과 8일에 서는
5일장이다. 신반장과 함께 의령에서 사람들을 가장 많이 만날 수 있는
날이다. 딱히 사야 할 물건이 있는 것도 아니고 딱히 약속을 정한 사
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장터로 향하는 발걸음은 한없이 가벼워 절로
콧노래까지 흥얼거린다. 아직 점심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인데도 장터
입구에서부터 위장은 다급히 구호의 신호를 보낸다. 앞다투어 내 후
각을 비집고 들어오는 온갖 먹거리들의 공습이다. 코를 통해 들어온
냄새는 며칠째 시골길의 건조한 흙냄새에만 갇혀있던 내 후각세포에
포착되어 전기신호로 변환되고 빛의 속도로 대뇌에 각인된다. 배고픔
의 정도와는 무관하게 세상이 정해놓은 끼니때가 되면 무조건반사로
위액을 쏟아내며 음식물을 달라고 아우성치는 습관적 허기와는 차원
19/01/28 의령전통시장
1부 김정권의 의령이야기_11
이 다른 배고픔이 일시에 몰려든다. 이럴 때는 인간의 후각능력이 다
른 포유동물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는 사실이 그나마 위안이 된다. 어묵
하나 먹고 따뜻한 국물로 배를 채운 뒤 천천히 시장을 구경 한다. 의령
시장에는 차선처럼 흰색 선과 노란색 선이 그어져 있다. (前)상인회장
주정용씨가 고안한 것으로 금지의 의미를 담은 선이다. 바닥에 물건
과 나물 등을 펼쳐놓고 파는 난전 상인들이 평일에는 노란 선을 장날
일 때는 흰 선을 넘지 못하도록 하여 노인들 통행이나 장 보는 것에
불편하지 않도록 만든 것이다. 오늘 장에도 할머니 손에 이끌러 장터
나온 갖가지 푸성귀들이 채반에 담겨 손님을 기다리는 모습이 참 정겹다. 땅에서 뽑혀 나오는 순간 생명선을 잃었던 풀들이 할머니의 채
반에 담겨 다시 생명성을 회복하는 과정이 참 아름답다. 아침 일찍 차
21/04/09 신반시장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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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타고 읍내 장터로 나온 어른들은 점심때가 지나면 하나둘 돌아갈
채비를 한다. 의령장을 도회지 5일장으로 생각하고 느지막하니 장 구경
나오다가 낭패 보기 일쑤다. 시골 5일장은 점심때가 지나면 폐장을 준
비하는 것이 보통이다. 의령장의 대표적인 정찬은 소고기국밥과 의령
소바다. 맛과 품위, 전통, 어느 면에서도 우열을 가리기 힘든 용호상
박이다. 덕분에 나는 매번 똑같은 고민을 해야 하지만 이렇게 행복한
고민과 선택의 시간이 또 어디 있겠는가. 내 선택을 결정하는 가장 큰
요소는 날씨다. 날이 흐리거나 비가 오는 날은 대개 소바를 먹는 편이
고 바람이 심하거나 추운 날은 국밥을 찾는 것이 보통이다. 그다음은
지난 며칠간의 내 식단이다. 지난 며칠은 라면에 칼국수에 밀가루 섭취가 과했던 탓인지 오늘은 자연스럽게 국밥집으로 발길이 간다. 의
의령전통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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령은 소고기국밥이 유명한 만큼 국밥을 잘하는 식당도 꽤 여러 집이
있다. 대표적인 식당으로 종로식당 중동식당 오서방 소고기 국밥 등
이 있다. 나는 딱히 어느 집을 정해 놓고 먹지는 않는데 이상한 것은
의령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가는 집만 가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입맛의 차이인지 각각의 인연과 내력에서 기인한 것인지는 잘 모르
겠다.
의령 소고기국밥의 첫 번째 매력은 국물의 시원함에 있다. 아니 시
원함의 깊이에 있다. 어설프게 흉내만 내는 도회지 국밥은 아무리 오래
끓이고 졸여도 이 맛이 나지 않는다. 의령 소고기국밥에는 역사가
있고 전통이 있고 애환이 있고 삶이 있다. 시원하면서 아프고 속이 풀
리면서 가슴이 멍해지는 맛 너머의 멋이 있다. 그래서 가마솥에 끓이
지 않으면 그것은 의령 소고기국밥이 아니다.
두 번째 매력은 큼지막하게 깍둑썰기한 고기의 십는 맛이다. 의령
말고는 이렇게 고기를 크게 썰어 넣은 소고기국밥을 나는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다. 하나만 입에 넣어도 거득한 고기를 두 개쯤 입에 넣고
볼이 터져라 십으면 입 전체로 퍼지는 고소함이라니, 그것은 그야말
로 극강의 먹는 즐거움이다. (의령소바의 매력에 대해서는 다음에 충
분히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몇 시간 동안의 짧은 분주함과 소란을 5일간의 나른함과 고요가 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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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 제1경 충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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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것이다. 물론 지금이야 전통시장 현대화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의령
시장도 번듯하게 아케이드가 설치되고 상설시장화되었지만 어디에서
도 5일장의 생동력과 활기를 찾아보기는 난망한 현실이다.
더욱이 작년부터 시작한 코로나19로 축제가 없었지만 의병제 등
축제가 있으면 축제장 부스를 활용하여 먹고 마시기 때문에 오히려
상인들은 힘들어진다. 따라서 의령의 축제 등 큰 행사 시 문화 관광정
책을 전통시장과 연계하는 고민은 계속되어야 한다. 나는 어린 시절
아버지 따라나섰던 의령시장의 옛 모습이 지금도 무척이나 그립고 또
그립다.
십수 년 전부터 전국적으로 시행되어온 이‘전통시장 현대화사업’
이라는 것이 사실 나는 못내 불만이다. 하나같이 아케이드로 지붕을
덮고 보도블록을 깔고 성냥갑같이 가게를 짜 넣어 여기가 저기 같고
저기가 여기 같은, 각각의 이름을 잃어버린 전통시장 1호, 2호, 3호를
만들어낸 것이다. 대형슈퍼마켓(SSM)으로부터 전통시장의 경쟁력을
보호하겠다는 목적으로 시작된 이 사업이 전국의 전통시장을 공장에
서 마구 찍어 나오는 공산품 수준으로 전락시켜 버린 것이다. 외형에
만 신경을 쓰다 진짜 제 모습은 다 잃어버린 것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
따라 나섰던 의령시장의 옛 모습이 나는 지금도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