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랜컬쳐 명상터 -무봉 박수형 최신간 명상집, 시끄러운 명상
3-15
그대 자신 외에 아무도 그대를 속일 수 없다 사랑과 집착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그것은 똑 같은 것처럼 보인다. 그것들은 비슷하지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집착은 증오에 더 가깝다. 집착은 사랑과 완전히 반대이다. 집착의 실체는 증오이지만 그것을 감추고 사랑의 모양을 나타낸다. 집착은 사랑을 죽인다. 집착보다 더 강한 독은 없다. 그것은 사랑처럼 보이는 소유욕이다. 집착, 즉 소유욕은 거짓된 사랑이다. 증오는 차라리 낫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체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것은 사람을 속이지 않는다. 증오는 언젠가 사랑으로 바뀔 수 있다. 그러나 소유욕은 결코 사랑으로 바뀌지 못한다. 왜 집착은 사랑처럼 보이는 것일까? 그 과정은 매우 미묘한 차이가 있다.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방이 너무나 중요해서 그대를 잃어버릴 수 있음을 뜻한다. 사랑은 헌신이다. 무조건이다. 한 가지 조건만 붙어 있어도 안 된다. 그러나 집착은 그대가 중심이라면 다른 사람은 하나의 수단이 되고 만다. 집착은 다른 사람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만족을 찾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 감사는 하지만 목적은 그대 자신이다. 사랑 속으로 들어가지도 않고도 그대는 사랑에 대한 모든 시와 노래를 통해 자신이 사랑하고 있다고 느낄 수 있다. 128 그대는 진정한 사랑이든, 그것 대신에 어떤 유사한 것이든 사랑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사랑 대신으로 빌려 온 것들은 모두 가짜이다. 그것은 당분간 그대에게 사랑하고 있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 가짜라 해도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조만간 그대는 그것이 가짜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가짜 사랑을 진짜 사랑으로 바꾸려면 첫째, 그대의 사랑이 가짜라는 것을 알 때 그대는 변화할 수 있다. 그럴 때만이 가짜 사랑을 내버리고 진짜 사랑을 할 수 있다. 둘째, 그대가‘이 사랑은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하고 오히려 불행을 준다.’라고 느낀다면 그대는 자신이 상대방을 속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그대를 속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대 자신 외에는 아무도 그대를 속일 수 없다. 상대방이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면 그대가 바로 거짓 사랑의 주범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진정한 사랑은 그대의 육체가 아니라 그대의 에고가 죽는 것이다. 그대서 사랑에 대한 공포는 죽음에 대한 공포, 명상에 대한 공포이다. 그대가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면 그대는 명상 속으로 들어갈 수 없고 기도도 할 수 없다. 그대가 사랑과 명상의 깊이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죽음의 아름다움 또한 완전히 맛보지 못할 것이다. 그대 자신 외에 아무도 그대를 속일 수 없음을 명상하라.*
3-16
천국과 지옥은 그대 존재의 자질이다 삶을 놓친 사람은 내세를 생각한다. 이번 생을 놓친 사람만이 다음 생을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을 놓치면, 저것도 놓칠 것이다. 그대의 존재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대가 억지로 천국에 간다면 그대는 천국을 지옥으로 바꾸어 놓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대의 마음을 떨쳐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대의 모든 과거는 항상 그대와 함께하고 있다. 그대는 그것을 지옥으로 만들 것이다 깨달은 사람은 천국이나 지옥이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천국과 지옥은 그대 존재의 자질인 것이다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살든 지옥의 삶을 살든 할 것이다.*
3-17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 중도에 머물라 마음은 양극단으로 움직이기를 좋아한다. 믿음은 그대가 의심할 때 필요한 것이다. 믿음에 관해 강조하는 것은 이미 의심이 마음에 있다는 것이다. 믿음이나 의심은 똑같이 지적인 문제이다. 그대는 어디에서 의심을 하는가? 마음에서부터 의심을 한다. 어디에서 믿게 되는가? 그것도 역시 마음으로부터 믿는 것이다. 믿음과 의심은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다 누가 믿을 것인가? 누구를 믿을 것인가? 문제의 근원은 바로 그대이다. 중도에 머물러라! 이것은 인간의 마음과 그 작용에 대해서 가장 근본적인 발견 중의 하나이다. 그대가 한 사람을 사랑한다. 사랑을 통해서 그대는 그 사람을 확대시킨다. 사랑하는 사람이 神이 되었다가 사랑이 사라지면 미워하기 시작한다. 아무도 중도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다. 깨달은 사람은‘중도에 머물라’고 말한다. 중도에는 마음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이 일어날 가능성이 없다. 생각은 믿음 아니면 의심, 사랑 아니면 미움, 적 아니면 친구로만 마음 작용을 계속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모든 친구 속에 모든 적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안다. 또한 모든 적속에 친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숨어 있다. 우정과 적개심은 한 마음의 양쪽 얼굴이다. 중도에 머물라, 중도에 머무는 것은 외줄타기와 같은 것이다. 그대는 외줄타기를 본 적이 있는가? 인생의 가장 깊은 진리중의 하나가 외줄타기에 들어있다. 왼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느끼면 얼른 오른 쪽으로 몸을 옮긴다. 오른 쪽으로 몸의 중심을 옮길 때는 왼쪽으로 기울어졌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반대쪽으로 움직이는 것은 단지 균형을 잡기 위해서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항상 싸운다. 그것은 일종의 균형잡기이다. 그대가 외줄타기를 그만 두지 않는 한 밀고 당김은 계속된다. 깨달은 사람은 말한다. <오른쪽으로 치우치지 말라. 왼쪽으로도 치우치지 말라. 그러면 그대의 마음이며, 그대의 에고인 밧줄에서 떨러질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계속 균형을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이중 인격자 처럼 보이며 모순적인 인간처럼 보일 것이다. 그대가 연인을, 아내를, 친구를 미워할 때 그대는 다시 다른 대상을 사랑할 수 있기 위한 균형을 잡는 것일 뿐이다. 그런 마음이 없으면 기껏해야 그대가 아는 사랑이나 증오가 사라질 뿐이다. 그대의 마음작용이 사랑도 미움도 만들어 낸다. 에고가 펼치는 미묘한 외줄타기가 끝난 후에 그대의 마음이 떨어져 나갔을 때, 그대의 에고가 죽어 버린 뒤에 그때 이중성을 초월한 자비심이 일어난다.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 중도에 머물라!*
3-18
사람은 영원한 연속체이다 사람은 영원한 연속체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계속된다. 단지, 육체만 태어났다가 죽는 것이다. 그러나 그 에너지는, 그 생명력은, 그 영혼은, 그 진아(眞我)는 그대가 어떻게 부르든 육체 속에는 의식이 존재하며 그것은 결코 태어나거나 죽는 일이 없다. 누가 오고, 누가 가는가? 만약에 그대가 이것을 이해하지 않는다면, 그때 그대는 ‘나는 홀로 왔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나는’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에고이다. 그‘나는’은 진아(眞我)가 아니다. 그‘나는’은 하나의 속박이다. 만약에 그곳에 어떤‘나’가 없다면 그대는 갑자기 자신이 태어난 적도 없으며 죽지도 않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때 거기에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그대 내면의 핵심은, 그 의식은 태어남도 모르고 죽음도 모른다. 그것은 현재도 미래도 모른다. 시간을 모른다. 그것은 영원하며 그 영원함은 시간의 부분이 아니다. 그대는 다른 어디로 갈 필요가 없다. 지금 그대가 있는 그대로 완전하다.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다. 지금 그 존재하는 현상을 인식하라. 그대가 누구라는 것을 인식하라. 단지 깨어 있으라. 그때는 아무것도 성취되지 않을 것이다. 아무런 노력도 쏟을 데가 없다. 깨어있는 사람은 모든 죽음과 탄생이 새 옷이나 새집으로 바뀌는 것임을 안다. 환경이 바뀔 뿐. 상황이 바뀔 뿐 그대는 여전히 남아 있다. 물질의 변화는 마치 원자핵은 변함이 없고 주위 전자의 갯수가 바뀌듯이 중심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영원하다.*
3-19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세상을 보라 머리 없이 존재하라. 그러면 돌연 그대는 이상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난생 처음으로 그대 자신이 가슴에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머리 없이 걸어라. 조용히 앉아서 눈을 감고 머리가 없다고 상상하라. 내 머리가 사라졌다고 느껴라. 처음에는 상상에 불과할 것이다 머리가 사라졌다고 느끼는 즉시 그대는 가슴으로 내려올 것이다. 그대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을 통해 세상을 볼 것이다. 사랑은 머리를 통해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맺고 있는 관계들이 더 많은 사랑에 기초할수록 가슴 센타가 활발하게 작용한다. 마음은 오직 분석할 뿐! 마음은 나누고 구분한다. 그러나 가슴은 통합한다. 오직 가슴만이 통일성을 준다. 가슴을 통해 세상을 보면 우주 전체가 단일체로 보인다. 반면에 마음을 통해서 보면 세상 전체가 원자로 쪼개어진다. 통일성은 사라지고 오직 수많은 원자가 있을 뿐이다. 가슴은 통합의 경험을 준다. 모든 것을 한데 묶어 연결시킨다. 가슴을 통해 보면 우주 전체가 하나로 보인다. 그 하나가 신(神)이다.*
3-20
세상에 남아 있어라. 그러나 그 안에 있지 마라
道를 아는 사람은
행동한다. 그러나 취하지는 않는다. 성취하나 명예도 바라지 않는다. 그는 단지 전체의 부분으로 살고 있다. 자식을 사랑하라. 그러나 소유하지는 말라. 아내와 남편을 사랑하라. 그러나 소유하지마라. 그대는 뭔가를 소유하는 순간, 깊은 곳에서 그대가 소유 당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소유하는 사람은 곧 소유당한 사람이다. 소유하지 마라. 소유는 곧 상대방의 중심을 파괴하려 할 것이고, 상대방은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다른 사람의 중심을 파괴하려고 한다면, 바로 그 노력으로 인해 그대 자신의 중심이 파괴될 것이다. 그때는 오직 폭풍만이 있고 중심은 없어질 것이다. 세상에 남아 있어라. 그러나 그 안에 있지 마라. 그대 깊숙한 곳에서 무엇인가 튀어 올라 하늘을 떠다니게 하라. 뿌리는 땅 속에 두고 가지는 하늘에 있게 하라
어떻게 명예를 바랄 수 있겠는가?
그는 단지 존재와 유기적인 통합체의 한 부분으로 사는 것일 뿐이다. 그는 존재의 일부이다. 그런데 자신을 내세울 수 있겠는가?
어떻게 파도가 대양 앞에서 무엇을 주장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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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는 단지 대양의 한 부분일 뿐이다. ‘승리하려고 노력하지 마라. 그러면 아무도 그대를 패배시키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삶의 논리이다. 주장하지 마라. 그러면 그대의 주장은 완전히 실현될 것이다. 승리하려 노력하지 마라. 그러면 그대의 승리는 절대적인 것이 된다. 하려고 하지 마라. 그저 있어라. 그러면 추구하는 모든 것이 스스로 찾아올 것이다. 道를 아는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그대가 정말로 어떤 바램도 없고, 어떤 명예나 명성, 성공, 야망을
요구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 귀결로써 성공과 승리가 생겨난다.>
그대의 빈 마음 안으로 전 존재가 쏟아진다. 그럼으로써 그대는 성취하는 것이다. 이것이 귀결이다. 결과가 아니다. 결과는 그것을 바랄 때 성립되는 것이며
귀결은 그것에 대해서 생각조차도 하지 않을 때, 아무런 욕망도 없고, 그것에 대한 생각도 없을 때 생기는 것이다. 귀결은 존재의 내면 법칙의 한 부분으로써 생겨난다. 그 법칙이 곧 도(道)라고 불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