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향佳野鄕칼럼

기타

가야향佳野鄕칼럼

소하 0 1157

 2f083633196d94b579232f6f708158b7_1629381695_58.png

박철한 시인. 문학평론가. 칼럼리스트 

 

나의 고향  -박철한

누구에게나 태어난 고장이 있다. 성장하며 놀던 아름다운 추억이 서림은 물론 언제 찾아도 친구가 웃는 얼굴로

달려 나와 반겨줄 것 같은 정겨움과 가슴 설렘 이는 곳이다. 나의 고향은 서해 중심지역이다.

그러나 바다와 4, 5킬로 떨어진 내륙 지역이므로 대부분 농업이 생계였다. 이곳에 약 80호가 생활하는 게

작지 않은 마을이었다. 나는 매일 아침 오면, 긴 밤 어둠의 무서움에 바르르 떨던 문풍지 방문의 손잡이를

부여잡은 채 바깥쪽으로 힘차게 밀어 연다. 이때 정면에 보이는 마을을 어른들이 오른 가리라 불렀다.

이곳에 언제부터인가 한 씨네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였다.

 

매일 아침 태양을 머리에 인산 그림자 따라 초가 20호의 아궁이 군불의 연기가 좁은 굴뚝에서 뭉게뭉게

피어난다. 한 집 두 집의 연기가 초가지붕을 솜이불로 새하얗게 덮을 때 이웃집의 아침밥 짓는 구수한

내음에 취하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시각장애인이신 할아버지가 사리 나무로 얼기설기 엮어 세운 사립문에

참새들이 모여 앉았다. 그곳이 참새들에게 최고의 데이트 장소였던 것 같다. 모여 앉아 지저귀는 참새 떼를

쫓으며, 사립문을 열고 나오자, 시장기 못 이긴 바다의 삼킴을 예방하려는 것인가? 푸른색 털옷 입은 수호신

호랑이 한 마리가 한발은 성황리에 딛고 또 다른 한발을 수룡 동을 디딘 채 바짝 웅크린 자세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그 엉덩이 밑으로 20호로 형성되었는데, 뒷산에 오르면 잔디밭이 넓게 형성되었는데

그곳을 멀 뻔 데기라 칭하였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이곳에 올라, 돼지 오줌보로 만든 공으로 축구

경기를 하던 천연 잔디 축구장이었으며, 어느 날은 전투 놀이의 전쟁터였다.

맞은편 오른 가리와 마주한 이곳이 바로 곤말이다.

 

길을 따라나오게 되면 약 40도 경사진 언덕과 연결되어있다. 겨울철 눈이 쌓이는 날이면, 동네 꼬마들

약속이나 한 듯 각자의 손에 비닐 포대를 들고 모였다. 언덕 꼭대기에서 각자 준비한 비닐 포대를 깔고

방석인 양 그 위에 양반 자세로 앉아 눈썰매 타기 시작한다. 이후 언덕의 빙판은 눈썰매의 횟수와 꼬마들의

함성에 비례하였다. 언덕이 유리거울과 같이 햇빛에 반들거리며 미끄러운 빙판으로 변했다. 마침 그곳을

아저씨에게 겨울철 청양고추 맛나도록 매섭게 혼나던 추억이 서린 언덕이다. 또한, 50m 길이의 언덕을

내려가면 조선 시대부터 자라 6, 25전쟁의 피난도 안 가고 한곳에서 생활하는 느티나무 고목이 서 있다.

언제나 하늘을 떠받고 있는 많은 가지가 이곳을 지나는 수많은 새의 휴식공간이자,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철에는 넓게 벌린 그늘로 행인들 포옹하여 시원함을 제공하는 휴식의 공간이었다.


이후 고유의 명절인 설날을 며칠 앞둔 대목쯤이면, 이곳이 매년 뻥튀기의 중심이었다. 그러자 차례상

준비로 분주한 아주머니들의 발걸음이 분주해졌다. 질끈 묶인 누런 천으로 짠 자루를 한 손에 든

아주머니들이 하나둘씩 모였다. 묶인 자루에서 털려 배부른 빈 깡통들 붉은 불꽃에 달궈진 둥근

회전 솥을 향해 일렬종대로 나란히 서 있다. 깡통마다 서로 다른 곡식들이 차 있었다. 어떤 깡통에는

누룽지가 담겨있었는데 이 깡통의 주인아주머니만 말이 없었다. 그 옆에 수수를 담은 깡통이 있었는데,

주인아주머니가 빛깔과 고소한 맛의 자랑을 하였다. 이때 그 옆 하얀 쌀이 담겨 있는 주인아주머니가

아이~! O 심이 엄마, 꿔준 쌀 다 먹었나 보네? 한 되 더 가져가지!”라는 말에 깡통 안의 반짝이는

쌀을 보게 되었다. 이렇게 잠시나마 담긴 곡물에 따라 자신의 신분이 오르락내리락하였다. 어린 마음에

깡통에도 신분과 계급이 있음을 느낄 때였다. 그때마다 ~’하는 대포를 쏘는 전쟁터에 있는 것 같은

요란한 소리에 놀라 현실로 돌아오게 하던 장소이다. 바로 이곳에서 알파벳 소문자 y자 형태의 양쪽으로

아름드리 플라타너스로 가득 찬 신장 노와 연결되어있는데, 그 신장 노를 가르는 냇가가 있다.


이 냇가는 바다와 연결되어 만조일 때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오곤 하였다. 그래서 매년 봄 방학이

되면 모기장으로 만든 그물을 펼쳐 들고, 차가운 물속에서 실뱀장어(치어)를 잡아 용돈을 마련하던

곳이기도 하였다. 또한, 매년 대보름이면 긴 둑을 태우며, 불꽃놀이 하던 곳이다.

 

버스정류장에서 좌측 길 약 800m 따라가면 초등학교가 있는데, 초입까지 20호의 상가로 도로

양면으로 조성되어있다. 그 뒤편으로 약 10여 호가 밀집돼 있고 초등학교 맞은편으로 10여 호가

산재하여있다. 이 길을 계속 따라가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남당리와 만나게 되는데

바로 이곳이 이호리 중촌마을이다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