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브레토 2, 무접 동네 포구나무 -뮤지컬&부용극 트리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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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브레토 2, 무접 동네 포구나무 -뮤지컬&부용극 트리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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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경주 기득권 문화 권력의 미움 받다

그러나 경주를 중심한 기존 예술인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능안은 문무왕이 실아계실 동안은 그 후광에 힘입어 그런대로 경주 활동이 이어질 수 있었지만 신문왕에 이르러서는 버텨내기가 쉽지 않았다. 거기다 원효 열반하시고 얼마 후 요석공주도 이승을 하직했다. 후원지들이 떠나시고 난 후는 경주 기득권 예술가들의 냉대가 매우 불편하게 하였다. 우륵선생도 경주에서 견디기 어려워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얘기가 남의 일 같지 않았다. 능안은 어릴 적 부터 들어왔던 아버지가 살으셨다는 옛 가야 왕도 김해 무접 마을 포구나무 동네로 가기로 작정한다. "귀녀 내 부모님 고향 남쪽 바닷가 김해로 떠납시다." "그렇게 해요 친정어머님께 말씀드리면 부모님께도 말씀 드릴게요" 며칠 후 박귀녀는 어머니께 사실을 고하였다.

 

아버지 어머니 용서 하소서.

불효자식 귀녀는 남편 능안을 따라서 떠나려 합니다.

낳아서 길러주신 부모님 은혜

귀녀는 가슴 담아 간직할게요.

아버지 어머니 만수무강 하옵소서.

 

어머니는 딸을 붙잡고 우시면서 금으로 된 목걸이 가락지 귀고리 등 귀금속을 주시면서 그 곳에 가서 잘 살아라 하시었다. 능안은 사랑하는 아네 귀녀와 함께 경주를 떠나는 것이었다.

 

5 능안 부모님 고향 옛 기야 왕도 김해로 오다.

나는야 왔다네 가야 땅 김해로

바다와 강물이 만나는 이곳

외국상선 출입도 빈번하구나

사람들 살림살이 넉넉한데다

인심도 후하고 아름다워라

조상의 숨결이 배어진 이곳

옛 부터 내려온 풍속에 따라

무리지어 노래하고 춤을 추누나

사람들 키 크고 이목구비 뚜렷해

춤추는 모습도 아름다워라

나는야 왔다네 조상 땅 김해로

 

해풍 부는 아름다운 해안선을 따라 많은 사람들이 살았고 외국배들의 왕래가 잦았다. 사람들은 씩씩하게 일하며 여유롭게 살고 있었다. 고기 해산물 등 먹거리가 풍부하였고 춤추고 노래하기를 즐겨 하였다. 사람들의 외모도 충청도나 경주 지역과는 달랐고 남녀가 키가 크고 큰 눈과 높은 코 등 이목구비가 뚜렷하여 춤추는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6 무용혼백 일렁이는 무접마을

그리던 유민산 기슭의 무접마을은 아버지가 동네사람들과 즐겨 춤추었다는 포구나무가 그대로 서 있었다. 어릴 적 부모님으로 부터 들었던 포구나무를 본 순간 벅찬 마음에 나무를 부둥켜안고 눈시울을 적셨다. 눈물을 머금은 체 능안은 춤을 춘다. 포구나무를 몇 번이나 돌면서 너울너울 춤을 춘다. 하나둘 동네사람들이 모여들어 구경하다 함께 춤을 추는 것이었다. 가야무는 춤추기를 좋아하는 이곳 사람들이서 간신히 명맥이 이어지고 있었으나 많이 훼손되어 진 것을 느끼게 하였다. 능안은 다시 가야무를 복원하기로 결심한다. 마을 사람들은 매우 좋아하였다. 생선과 곡식 과일을 갖고 와서 함께 나누어 먹고 노래하며 춤을 추었다. 능안은 안정을 찾고 무용에 몰두 할 수 있었다. 바다에 접한 김해는 배의 안전을 위해 용신제가 잦은 편이었고 그 행사에 자주 불리어 가기도 하였다. 거기다가 능안의 용신제 춤은 효험이 좋더라는 뱃사람들의 소문도 있어 먼 곳의 어촌에서도 요청들이 와서 바쁜 나날을 보내기도 하였다. 경주에서처럼 시기하는 자도 없어 능안은 마음 편히 무용 활동을 하였다.

 

7 무접 포구나무 무용촌 동네 번성하다.

김해 해안선은 오랜 옛 부터 그랬듯 철 수출 등으로 외국 배들의 왕래가 심했다. 그 수출입을 하는 큰 상인들이 많이 살았고 부유하였다. 그들의 자녀들이 무접마을에 무용배우는 이들이 많아 후원자가 늘어났다. 능안과 귀녀의 무용 배움터는 점점 번성하고 커져 갔다. 경제적 여유와 함께 큰 무용 시설을 하였고 흉년이 들어 어려운 사람들에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동네 마당의 포구나무아래서 풍요로운 춤 잔치를 벌리며 사람들에게 맛있는 음식도 대접하였다

 

8 능안 일본에도 가야무 전수하다

능안은 가까운 일본 후쿠오카 지방 부근에 가야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음을 외국 상인들로부터 듣고 그 지방을 간간이 왕래하였다. 그곳에서 가야무를 전파하였는데 가야 후손들은 매우 좋아하였다. 일본으로 가는 도중에 가까운 대마도에 들렸다가 가는데 대마도에는 옛 가야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곳에서 며칠 묵는 동안 춤을 추었는데 너무나 좋아하는 것이었다. 많은 선물을 받고 일본 본토 후쿠오카 쪽으로 건너가서 춤을 천수하였다. 오늘날에도 해마다 봄이면 가야 마쯔리(축제) 행사를 할 때 가야 춤을 추는데 원형은 많이 훼손되었지만 그 뿌리는 남아 있다하겠다.

 

9 가접(伽蝶)무희 기야무에 적셔지다

많은 세월이 흐르고 흘렀다. 춤은 하늘과 땅의 기운을 잇는 그 무엇이 있듯 춤의 세계는 신령스러운 기운이 감도는 것이었다. 오늘에 와서 머언 한양에서 춤을 익힌 <가접>이란 무희가 스스로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세상 인연에 이끌려 이곳에 와서 살게 된다. 거기다 무희 가접은 가야왕도가 한반도 예술의 시원지임을 듣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야무에 관심과 함께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일찌기 스승으로 부터 무용전반을 배우며 전문가 어른들의 칭찬을 받아왔다. 그러나 가야무를 특별히 배운 건 아니었다. 하지만 무슨 연유인지 가야고도 무접동네 부근으로 온 이후 설명할 수 없는 손에 이끌리어 이곳 환경에 부응하며 무용에 침잠하게 된다. 거기다 거의 반생을 바쳐 가야사를 토대한 예술 작품을 쓰는 작가를 만나는 인연이 맺어지는 것이었다. 가접 무희는 본인도 모르는 어떤 신비한 힘에 이끌리는 기분을 맛보게 된다. 그는 능안의 가야지무 뿌리를 이어받아 법고창신의 자세로 새로운 가야무를 창조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10 글로벌의 물결로 세계인의 사랑받다

또한 글로벌시대를 맞아 제자들로 구성된 공연단을 이끌고 유럽으로 가게 되고 서구인들로 부터 비상한 관심을 얻게 된다. 한국현실에서 수도 서울 아닌 지방 예술이 글로벌화의 주역이 되는 이변을 낳게 된 것이다. 가야의 정신문화인 인간상호 간의 배려성과 예술성, 국제성이 세계인의 보편적 가치에 공감을 얻었기에 가진 결과이다.

 

앞으로 중국과 코리아의 부상과 함께 번영할 부울경 남해안벨트의 거대 도시형성과 더불어 수도권과는 확연히 차별화되는 새롭고 개성 넘치는 예술의 창조와 형성이 이루어질 것이고 이미 그 징후가 보이기도하다.

 

능안의 후예여 가접무희여

가야의 전설담긴 유민산 기슭

그 이름 무접마을 향기롭구나

춤추는 혼령들이 숨 쉬는 무접동네

하늘과 땅을 잇는 능안의 몸짓

춤춰라 나비처럼 그 열정 다하도록

너희는 거룩하신 천상의 매계자

능안의 그 정신 보태어져서

가야의 무용이 이어지리니

능안의 후계자여 가접 무희여

한반도 예술시원 가야지무 정통적자

오늘도 이어 가리 능안의 몸짓

천지신명 가야지무 굽어보소서

가접 무희의 새 가야지무의 노래

나는야 부름 받아 춤추는 가접 무희

하늘과 땅 사이에 나비가 되고 지고

상제님 뜻을 받아 지상에 전달하고

사람들 희노애락 천상에 전해주리

한반도 문화예술 발상지 가야왕도

능안의 몸짓이은 기야지무 이어받아

그 뿌리 소중하게 이어서 담아오며

한반도 백두대간 끝자락 위치하여

충천하는 에너지에 남해바다 해풍 받아

개성이 넘쳐나는 새로운 창조예술

깊은 감동 기인 여운 그 이름 영원하리

 

11 천년을 이어온 포구나무

무접 동네 수령 230년 포구나무(팽나무)는 김해시에서 40여 년 전부터 보호수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무접 동네 포구나무

천년의 침묵 속에

천년의 추억이여

여름철 짙은 녹색

가을엔 노랑색깔

찬 겨울 앙상한 가지

봄날을 기다렸지

까마득한 그 옛날

유민공주 슬픔담긴

유민산 무접 동네

능안의 춤사위에

온 동네 춤을 췄지

대대로 이어오며 추억을 보탰으리

언제나 무성한 잎 그늘 만들고

사람들 희노애락 지켜보면서

기쁨과 슬픔을 같이했었지

어질고 착한 성품

무접 마을 사람들

오늘도 나비처럼 춤추었던

달콤한 그 추억 잠겨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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