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브레토 1, 무접 동네 포구나무 -뮤지컬&부용극 트리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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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브레토 1, 무접 동네 포구나무 -뮤지컬&부용극 트리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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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브레토 (뮤지컬& 부용극 트리트먼트)

 

무접 동네 포구나무

 

리브레토 박경용

 

1능안의 아버지 아야기

능안이 아버지로 부터 듣고 기억하는 옛날 할아버지 적 일어났던 이야기의 내용은 이러하다. 능안의 집안 조상들은 가야가 신라에 합병되기 전에는 가야사람으로 김해 가야왕궁과 멀지 않는 무접동네에서 살았다. 무접동네는 언제부터인지는 모르나 오래전부터 동네사람들이 동네 앞 포구나무 둘레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좋아하여 동네이름을 무접(舞蜨)동네라 불렀다.

 

가야가 신라에 귀속될 즈음 가야의 귀족들은 일본으로 이주하는 숫자가 많았다. 무접동네 능안의 아버지 가야 무용수는 아버지 어머니가 떠나시는 일본으로 따라가야 했으나 고민 끝에 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사랑하는 연인 무용수가 있었고 그 가족들은 가야수도 김해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얼마 후 신라는 국가정책으로 백성을 이사시키는 사민(舍民)정책을 과감하게 실시하여 옛 가야 귀족들을 나라가 권유하는 함경도나 충청도 등 먼 지역으로 뿔뿔이 이사하게 하였다. 이사하기 전 가정 정들었던 무접동네 포구나무를 눈을 감은 체 한참 부둥켜안고 있다. 더 앞에서 춤을 추는 것이었다. 동네사람들도 지켜 서서 보고 있다가 하나둘 합류하여 춤추며 이별이 아쉬움을 달래었었다.

 

능안의 아버지 가야 무용수는 사랑하는 연인 가족이 가는 청주로 가서 결국은 결혼하게 된다. 청주는 가야 왕도처럼 시원한 바다는 보이지 않았으나 위로는 우암산이 위치하고 강과 들이 아름다운 고장이이었고 인심도 좋았다. 그곳에서 부부 무용수는 가야무를 추며 제자들을 길렀다. 살기에 궁색하지 않은 사람들은 춤추기를 좋아하였고 배우기를 즐겨 하여 춤을 추며 동네 분위기가 좋았다.

 

능안의 아버지는 주위사람들의 신임도 얻고 하여 나라의 인정을 받아 지방의 벼슬자리도 갖게 되었다. 능안의 어머니는 계속 가야무를 이어갔었다. 가야무는 구지봉 영신가무로 알 수 있듯 한반도 무용예술의 시원지의 토대에서 외국인들과의 교류에다 인도 공주 허황옥 무리무용의 영향을 주고받으며 형성된 고대 무용이라 하겠다.

 

춤추는 무용수여

영혼의 모습이여

하늘땅의 중간자

정직한 전달자여

너의 춤은 나에게

기쁨과 위로 되나니

훨훨 추어라

나비처럼 추어라

 

2 문무왕 능안의 가야지무를 격찬하다

문무왕 810월에 왕이 환경(還京)의 길을 떠나 옥돌역에 이르렀을 때 국원경의 사신(仕臣)인 대아찬 용장(龍長)이 잔치를 베풀고 음악을 연주하였다. 내마원주(奈麻原周)의 아들 15세의 능안(能安)이 가야의 춤을 추었다. 왕은 그동안 경주에서 보아왔던 신라 춤과는 너무나 다르고 아름다운 동작에 매료되었다. 감동한 왕은 무슨춤이냑고 물었는데 가야지무(加耶之舞)라고 대답하였다. 경주에서 보아온 춤과는 다른 참 아름답고 힘차도다. 왕은 격찬을 하며 황금잔에 술을 부어 권하고 큰상을 내리며 경주로 불러들이겠노라고 하였다.

 

3 경주생활 시작되다.

드디어 이듬해 능안이 16세 되던 봄 경주로 올라오라는 조정의 전갈을 받았다. 왕궁에서 가야지 무를 추었는데 왕후를 비롯하여 신하들이 모두 격찬하였다. 그 이후 능안은 궁중에 자주 불리어가서 춤을 추었다. 그러다가 19세 되던 해 무용을 배우던 신라 귀족의 따님 17세 박 귀옥과 사랑이 맺어졌다. 하지만 귀옥의 아버지는 신분의 격차를 말하며 결혼을 허락지 않았다. 그는 아들이 화랑인 신라 귀족과 사돈을 맺기로 언약한 상태였다. 능안은 박귀녀의 아버지 반대도 있었지만 기어이 결혼을 하게 된다. 이들은 무용수 부부가 되어 본격적으로 무용을 하게 된다.

 

3 원효를 도와 춤을 추다

그 당시 원효대사가 불교의 화엄사상을 대중에게 전파하기 위한 수단으로 무애무(無碍舞)를 즐겨 활용하였는데 능안을 춤추게 하였다. "모든 무애인은 한결같이 생사를 벗어난다."는 화엄경의 내용을 빌어 무애라 명명하고 대중들에게 노래와 춤으로 교화하였다. 이 춤으로 대중의 호응을 얻게 하여 교화시켰고 인도 즉 천축국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으나 그 뿌리는 가야지무를 토대한 것이었다 고래로 내려오는 신라의 민속무인 가무백희나 회소가무 도솔가무와는 동작이 달랐고 발놀림이 속도감과 함께 매우 세련미가 있어 신선감을 주었다. 원효부인 요석공주의 후원도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이로써 기존의 신라무 가무백희를 비롯한 여러 무용에도 변화를 주게 된 것이다.

 

일체의 차별을 초월한 부처님모습

티끌 속에 온 누리 들어있고

영원한 시간 속에 한 생각 들어있네

모든 무애인(無碍人)은 한결같이

생사를 벗어나도다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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