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야의 거시기 (巨詩記)-멸치/김 기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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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의 거시기 (巨詩記)-멸치/김 기택

GOYA 0 53
♡멸치/김 기택

굳어지기 전까지 저 딱딱한 것들은 물결이었다
파도와 해일이 쉬고 있는 바닷속
지느러미 물결 사이에 끼어
유유히 흘러 다니던 무수한 갈래의 길이었다
그물이 물결 속에서 멸치들을 떼어 냈던 것이다
햇빛이 꼿꼿한 직선들 틈에 끼이자마자
부드러운 물결은 팔딱거리다 길을 잃었을 것이다
바람과 햇볕이 달라붙어 물기를 빨아들이는 동안
바다의 무늬는 뼈다귀처럼 남아
멸치의 등과 지느러미 위에서 딱딱하게 굳어 갔던 것이다
모래 더미처럼 길거리에 쌓이고
건어물집의 푸석한 공기에 풀리다가
기름에 튀겨지고 접시에 담겨졌던 것이다
지금 젓가락 끝에 깍두기처럼 딱딱하게 잡히는 이 멸치에는
두껍고 뻣뻣한 공기를 뚫고 흘러가는
바다가 있다 그 바다에는 아직도
지느러미가 있고 지느러미를 흔드는 물결이 있다
이 작은 물결이
지금도 멸치의 몸통을 뒤틀고 있는 이 작은 무늬가
파도를 만들고 해일을 부르고
고깃배를 부수고 그물을 찢었던 것이다

♡시를 들여다 보다가

  마침 밥을 먹다가 고소하게 볶아진 멸치를 먹는다.그저 맛나기만 한 이 멸치에도 이토록 진중한 의미가 담겨있었다.멸치의 바싹 마른 은빛표면에 물결이 쉬고 있음을 어이 알았겠으며 햇볕이 달라붙어 빨아들인 물기로 딱딱하게 변해버린 바다의 무늬는 또 어찌 눈치챌 수 있으리요?우리는 아니 나는 그저 바삭하게 튀겨진 멸치에 얹어진 아내의손맛에 감탄만 하였을 뿐이었고 접시에 담겨진 멸치의 무리를숟가락으로 뭉퉁거려 입안에 털어넣기를 반복하였을 따름.
  이 작은 멸치에 붙어있는 작은 무늬가 파도를 만들고 해일을 부르며 고깃배를 부수고 그물을 찢는 엄청난 일을 해내고 앉아뻔뻔하게 고소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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