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야의 거시기(巨詩記)-밀봉된 것들은 뜯지 않을 때까지 진심이다/권 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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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의 거시기(巨詩記)-밀봉된 것들은 뜯지 않을 때까지 진심이다/권 현형

GOYA 0 130
♡밀봉된 것들은 뜯지 않을 때까지 진심이다/권 현형
 
복도에 뜯지 않은 상자들이 나란히 놓여 있다
박제된 무엇이 상자 속에 들어있나
물기 없는 꽃? 나비? 접시?
상자마다 진심이 들어 있을 것이다

빛을 어디서 살 수 있나 찾아 헤맸는데
지하철에서 빛이 담긴 상자를 천 원에 팔고 있다

손전등만한 빛을 어디다 쓰려고 사나
쓸모없어, 다신 사지 않을 거야, 금방 후회하는 얼굴로
빛을 헐값에 산 자들이 전철 안에 담겨 있다

손전등을 들고도 캄캄한 얼굴로 앉아 있다
기회가 될 때마다 우비를 사고
초강력 본드를 사고 티눈 연고를 사고 절명 직전까지
원 플러스 원으로 빛을 조금씩 사 모으는 것일까

언젠가 고속버스 안에서 금딱지 시계를 살 수 있는 행운에 당첨되었는데도 번호표를 쥐고만 있었다
움직이는 전철 안에서 파는 빛 한 상자를 사지 못했다

밀봉된 빛을 마침내 뜯으면
유통기한이 없는 어둠이 왈칵 쏟아져 나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시집<아마도 빛은 위로>/권 현형/여우난골출판

♡시를 들여다 보다가

  요며칠 기사를 보다보니 쇼핑중독에 빠진 60대 중국의 여성이 최소2억원어치의 택배물건을 집안에 쌓아두어 주변사람들을 힘들게 하다가 이슈화되었다는 내용을 보았다.
말그대로 쇼핑중독이다보니 사기만 열심히 사고 사는재미에
빠져 필요도 없는 물건까지 구매하다보니 뜯지도 않는 식료품
들이 썩어지며 악취까지 풍겨 주변을 오염시켰다는 고소고발이
잇따랐다는 것이었다.공교롭게도 이 시를 접할 바로 그 때에
이런 기사를 접하고 보니 밀봉된 것들의 심정을 돌아보게 되었다.집안에 뜯지도 않고 보관만 하고 있었던 택배 상자들의
답답한 진심은 한동안 속이 썩어문드러졌을 것이다.어두운
상자 속에 들어앉아 곧이어 쏟아질 빛들에 대한 기대치를 잔뜩
높여 놓고 기다리고 있었을 진심들의 실망스러움.시인은 이 시에서 지하철등지에서 쉽게 취할 수있는 빛을 떠 올렸다.
그리고는 역설적으로 어두운 상태를 파하는 빛을 택배상자에서
벗어나는 쉬운 방법으로 단정지으며 박스안에 갇혀있던 어둠이
밀봉상태에서 쏟아져 나온다고 결론지었다.
오늘도 우리는 클릭 몇번으로 문 밖에 도착해 환한 빛으로 들어와 어둠을 쏟아내게 할 행위에 중독되어 그들의 진심을
테스트로 건드려 볼 심산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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