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야의 거시기 (巨詩記)-고무장갑을 위한 변명/배 종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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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의 거시기 (巨詩記)-고무장갑을 위한 변명/배 종영

GOYA 0 29
♡고무장갑을 위한 변명/배 종영

우리 집에 서열이 있다면
아마도 고무장갑이  그중 갑(甲)이다.
주방에선 고무장갑을 낀 손이 나름의 전력(戰力)이다.

누구든 저 장갑을 끼기만 하면 큰소리를 탕탕 친다.
그 앞에선 하물며 그릇들도 우당탕탕 부딪는 소리를 낸다.
말하자면 고무장갑이 완장인 셈이다.

그 옛날 이른 겨울 아침 부엌의
벌겋게 달아오른 어머니의 손,
김이 무럭무럭 나던 그 손 같은 고무장갑
먹고 사는 일 그 뒤끝을 닦아내는 일이 설거지라면
손에도 유전자가 있지 않을까.

아무리 엉킨 그릇들도 저 손이 휘젓고 나면
반듯해지고 가지런히 포개진다.

한 집안의 식성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손,
할아버지의 묽은 식성은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고집 센 아들의 밥그릇에 말라붙은 밥풀은
잘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
젖지 않고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 집착이다.

고무장갑은 어떤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우리 집에서 제일 신분이 천한 수드라,
어지러운 곳에선 때로
가장 낮은 자가 가장 목소리가 크다.

하루의 일을 끝낸 지친 손,
물기 마른 싱크대에 손목을 꺽고 곤한 잠을 자고 있다.
깰까 봐 냉장고 문을 살살 열었다.

-배 종영시집<사유하는 팔꿈치>中에서

♡시를 들여다 보다가

  한 때는 지엄하신 어머님의 분부를 받들고는 부엌 근처에는
얼씬도 못 했다. 정말이지 남자들은 부엌주변에서 어슬렁거리
다가는 괜히 한마디 듣거나 경을 칠 일이기도 하였다.하물며
고무장갑을 낀다?하늘나라에서 내려다 보시다가 깜놀해서
순식간에 간섭하러 뛰어내려 오실 일이다.
그런데 이젠 그럴 일이 아니다.소위 말하는 부엌이라는 구분도
없어졌을 뿐더러 굳이 남자나 여자가 할 일 못할 일이란 게 따로
없어졌기 때문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무장갑을 낀 손은 나름 전력(戰力)을 갖춘 갑(甲)의 서열을 유지하고 있다.
왜?왜일까? 그야말로 고무장갑이 완장이라서? 시뻘건 색을
보유한 적색분자로 끌어 오르는 화(火)의 세기에서 서열 1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아니다.그건 아닌 것 같다.
  그 이유?그건 아마도 시인이 지적하듯 고무장갑을 낀 손은
어떤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는 천한 신분을 감내하기 때문이겠다.그 손은 때로 우당탕 큰 소리를 내기도 하는데 그 큰
소리가 사그라들지 않음은 평소의 낮은 자리에서의 묵묵함과
정돈됨이 배경에 깔려 있기 때문이리라! 이제 어무이의 세대는
가고 아내의 세대로 넘어 온 세대에도 여전히 고무장갑은 위력을 발휘하는 중이다.다만 그 고무장갑을 끼고 무력(?)을
행사하는 이가 반드시 여자는 아니라는 게 함정.
이젠 남자도 고무장갑을 낀 채 가장 낮은 자리에서 식구들의
안위와 생계를 보살펴야 하는 일이 다반사다.
그리고 그에 따라 피곤한 남편을 위해 깨지 않도록 냉장고 문을
살살 여닫을 일이다. 물론 고무장갑의 색깔도 적색에서 청색으로 혹은 회색빛으로 바뀔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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