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야의 거시기(巨詩記)-폐타이어/김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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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의 거시기(巨詩記)-폐타이어/김종현

GOYA 0 152

♡폐타이어/김종현


아파트 공터 한 귀퉁이 

속도를 잊은 폐타이어

땅 속에 반쯤 묻힌 깊은 침묵 속

햇빛을 둥글게 가두어 놓고

동그랗게 누워있다


그가 그냥 바퀴 였을 때는 단지

속도를 섬기는 한 마리 검은 노예일 뿐이었다

날마다 속도에 사육되고

길들어 갔다

다른 속도가 그를 앞질러 갈 때

그는 바르르 떨며

가속 결의를 다져야 했다

자주 바뀌는 공중의 표정 앞에서는

잽싸게 꼬리를 사려야 했다

검고 딱딱한 세계 위에서 세월을 소모하며

제한된 영역만 누려야 했다


지금 저 동그라미는 자신의 일생이

얼마나 속도에 짓눌려 왔는지 기억하고 있을까

튕겨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쯤은 했으리라

얼마나 어지러웠을까

속도에서 벗어나기 위해 속도에 매달린 세월


그가 속도의 덫에서 풀려나던 날

온 몸이 닳도록 달려온 일생을 위로하듯

바람은 그의 몸을 부드럽게 핥아 주었다

잠시 뒤의 어떤 바람은 풀씨랑 꽃씨를

데리고 와서 놀아 주었다

벌레들의 따뜻한 집이 되었다

잃어버린 속도의 기억 한가운데

초록의 꿈들이 자란다

노란 달맞이꽃은 왕관처럼 환히 피어 있다


<200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

 

♡시를 들여다 보다가...


나는 과연 이 시를 읽을 자격이 있는가?

사물을 들여다 보는 시선이 내게도 있었던가?

별것도 아닌 시제로 인생을 회자하고야 마는 솜씨는

부럽고 감탄스럽다.

그저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폐타이어를 들여다 보면서

그 속에서 속도감에 취해있는 인생을 찾아내고

그 속도를 위해 짓눌린 세월의 어지러움을 집어낸다.

특히<속도에서 벗어나기 위해 속도에 매달린 세월>에서는

뼈 아픈 반성을 공감케한다.

그리고 결국 이 반성은 초록의 꿈들이 자라게 되는 계기가 되어 버린다.

<잃어버린 속도의 기억 한가운데 초록의 꿈들이 자란다>

왕관처럼 환한 노란 달맞이꽃이 웃는다.

평소에 내 주변에 널브러진 감성을 찾는다고 말해왔던 나 자신을 꼬집어 본다.

너무나 쉽게 사물을 접해 왔던 게 아니었는지...

다르게 보는 눈과 감성을 지녀야 한다.

똑같은 눈은 재미가 없다.

다르니까 다르게 봐야 한다.

좋은 생각은 좋은 글을 뽑아 낼 근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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