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루의 촛불, 사맹무지 -김관식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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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루의 촛불, 사맹무지 -김관식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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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맹무지(思盲無智)



                   김관식


색깔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을 일컬어 색맹이라고 한다. 사맹은 오늘날 첨단과학의 발달로 디지털시대 대중매체와 컴퓨터의 발달로 인간의 고유한 특권이라고 할 수 있는 사색과 사유 기능이 퇴화하여 대중매체가 의도한 대로 따라서 흉내를 내는 생각이 없는 사람을 일컬어 필자는 思盲이라 명명하였다.

 

사맹은 생각하기를 싫어하고 그저 매스미디어에 등장하는 시뮬라크라에 오염된 사람들을 일컫는다. 시뮬라크르(simulacre)는 시늉, 흉내, 모의라는 뜻을 지닌 용어로 가상, 거짓 그림 등의 뜻을 가진 라틴어 시뮬라크룸에서 유래한 말인데, 이 낱말은 영어 안에도 그대로 흡수되어서 모조품, 가짜 물건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 놓은 인공물인데,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처럼, 때로는 존재하는 것보다 더 실재처럼 인식되는 대체물로 오늘날 컴퓨터 속의 가상의 세계를 일컫는다. 사람들은 조작된 영상물에 의해 현실과 가상의 세계를 혼돈하게 된다. 환상적인 광고의 영상을 보고 광고 속의 이미지를 쫓아 생각 없이 물건을 구입하여 행복감을 누리는 등 그야말로 주인이 주는 대로 먹고 살아가는 가축처럼 길들여져 가게 되는, 대중매체의 노예로 전락하여 수동적인 인간으로 살아가며 행복감을 느끼며 살아가게 된다.

 

자기 존재의 주체성을 망각하고 환상과 현실을 구별하지 못하는 삶을 살아간다. 자기 존재에 대한 주체적인 자율권을 스스로가 잃어버렸다는 사실은 생각하는 기능이 퇴화된 사맹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맹인지를 모르고 살아간다. 모두들 바쁘다는 핑계를 댄다. 사실 사맹의 이면에는 물질적인 가치관이 자리 잡아 철학적인 사색으로 자신의 존재에 대한 확인이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할 것인데 두뇌에 물질에 대한 소유욕으로 가득 차 사고기능이 마비되어 버린 것이다.

 

즉 물질화되어 버린 것이다. 물론 프랑스의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는 인간의 예술작품에 대한 상상력의 근원을 물, , , 공기라는 4원소로 파악하기도 했지만, 그의 분석은 이러한 인간의 정신적인 세계를 과학적으로 추출해낸 결과이지만 그의 이론은 어김없이 시와 예술작품을 분석하고 감상할 때 어긋남이 없이 맞아떨어지고 있다. 필자는 문학평론 작업을 40년 가까이 해오면서 시인들이 보내온 시집을 잃고 가스통 바슐라르의 이론에 입각해서 작품을 보면 거의 일치하는 점을 많이 발견하였다.

 

우리나라 문단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현대시의 분수령인 시문학파의 한 사람인 김영랑의 고향은 강진이다. 강진은 탐진강과 강진만이 있는 곳으로 도처에 물과 가까운 곳이기 때문에 그의 모든 시 작품이 바슐라르의 4원소론에 입각하여 상당 부분 물의 이미지가 주조를 이루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시각은 여러 시인들의 작품들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며 시뿐만 아니라 소설, 수필, 등의 여타 문학 장르, 그리고 미술, 음악 등 예술 분야에서도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오늘날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도시화의 물결로 바슐라르의 4 원소론을 바탕으로 할 고향의 4원소 이미지가 각인될 수 없는 어린 시절을 보낸다. 자연에 가한 폭력문화의 일종인 아파트와 빌딩, 그리고 자동차, 텔레비전, 컴퓨터 등 인위적인 문명 속에서 자연을 떠난 시뮬라크라 속의 4원소 이미지가 정신세계를 지배하게 된다.

 

그래서 자연과 호흡이 없이 태어났기 때문에 더욱 물질적이며 가상적이며 4원소가 가상세계에 혼합된 융합의 고향 이미지로 향후 도시에서 태어난 사람들의 예술세계는 참으로 참혹하고 비인간적이고 수동적이고 가식적이며, 폭력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필자는 예견하고 있다.

 

모든 것이 기능적으로 움직이며 컴퓨터 통신의 발달로 사람과 사람과의 인간적인 교류가 끊어지고 모두들 인간들이 자연에 폭력을 가해 만들어 놓은 인위적인 콘크리트 문화 속에서 스스로가 갇혀 컴퓨터만 들여다보고 가상의 세계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물질을 추구하며 모든 인간의 가치, , 행복과 윤리 도덕을 위반한 비도덕적인 행위에 대한 명예 실추에 대한 회복도 화폐로 보상하고 사랑도 화폐요, 인간의 정도 화폐로 환산되는 비인간적인 행동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편리함에 따른 물질 추구가 자연을 파괴로 이어지는 심각성조차도 물질로 극복하려는 환상에 빠져들게 된다. 그러나 자연의 재앙은 환상이 아니다. 점점 다가오는 새로운 질병들, 지구온난화, 국지방의 빙하가 녹고 해수면의 상승으로 태평양의 투발루라는 나라가 물에 잠기고, 황사현상, 해양생태의 변화로 잡히던 물고기가 잡히지 않는 등 기괴한 현상에 직면하고 인간의 폭력은 극해 달해 인간적인 감성이 없어진 도저히 인간의 행동이라고 볼 수 없는 기계적인 폭력 살해 사건이 속출되는 것은 바로 인간이 편리함을 추구하다 만들어낸 첨단과학기술의 도구에 의해 지배를 당하는 사맹의 시대가 되어 無智한 행동이 연출된 것이다.

 

무식한 사람은 아는 것이 없을 뿐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 오히려 교활한 사람에게 속임을 당할 뿐이다, 그러나 無智한 사람은 思盲이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고 극악무도한 짓을 무자비하게 감행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남기게 된다. 분별없는 극우, 극좌의 행동은 모두 무지의 소행이다. 교육은 인간을 인간답게 가르치는 것이다. 따라서 선생님이 思盲이면 그 제자도 思盲일 수밖에 없다. 몇 마디 지식이 뭐 그리 대단하겠는가?

 

인터넷이 발달되어 편리하게 검색하면 머리에다 저장해둘 필요가 있겠는가? 사람들은 가족의 전화번호까지도 외우지 못한다. 모두 핸드폰 속에 들어 있기 때문에 핸드폰만을 믿고 산다. 기계는 믿어도 사람은 믿지 않는다. 이게 이디 사람들이 사는 세상인가 한번쯤 생각해보라. 가족 간에 대화도 끊어졌다. 텔레비전과 컴퓨터 화면을 쳐다보며 낄낄거리며 좋아라하는 세상이다.

 

이러한 시대에 인간이 왜 사는가? 왜 존재해야 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해답을 스스로 생각하며 동물보다 더 잔인하고 교활한 삶을 살지 않도록 인성교육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 아니 가르칠 것이 아니라 교사가 먼저 모델링이 되어야 할 막중한 사명이 있는 것이다.

 

깨우치지 못하고 승진이나 쫓아다니고 주식, 부동산 투자에 열을 올리고 연수를 게을리하는 어리석음을 자성하고 교육자 본연의 자세를 가다듬을 때이다. 그리하여 교육자가 먼저 思盲無智의 세계에서 탈출하여 생각하는 삶을 실천하는 모델링을 제시하는 사도의 길을 걸어가야 할 것이다.

 

김관식 시인.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노산문학상 수상.

백교문학상 대상 수상. 김우종문학상 수상. 황조근정 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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