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식 문학칼럼 31 - 박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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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식 문학칼럼 31 - 박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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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칼럼] 박태원의 ‘방란장 주인’에서 배우는 문인의 자세
민병식

박태원은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이던 1926년 ‘조선문’에 시 ‘누님’을 발표하며 등단했고, 일본 유학 이후 귀국한 1931년 부터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1933년 이태준, 정지용, 이상 등과 함께 순문학적, 유미주의적 성향의 구인회를 결성했고, 광복 후인 1946년 좌익 계열의 문학인 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을 맡는 등 잠시 남로당 계열의 문예 운동에 몸을 담았다가, 1948년 보도연맹에 가입하며 전향했다.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후 서울에 온 이태준, 안회남, 등을 따라 월북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자세한 정황은 분명치 않다. 1950년대 중반부터 지방과 평양을 오가다가 말년에 완전 실명하고 전신 불수가 되는 등 병마에 시달렸고 병상에 누워 역사 소설을 집필하며 여생을 보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일본의 군국주의를 미화한 ‘군국의 어머니’라는 책을 낸 적도 있으나 친일 행적이 아주 노골적이지는 않아서, '소극적 협력'으로도 불리고 있으며, 친일인명사전 최종 명단에서는 제외되었고, 2002년 공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에 선정되어 있다. 


이 소설은 박태원이 1936년 구인회의 동인지 ‘시와 소설’ 창간호에 발표된 작품으로 5,558자에 이르는 소설 전문이 단 한 문장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소설은 국내 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볼 수 없다. 마침표가 없이 계속 이어지는 한 문장만으로 2년에 걸친 주인공의 고뇌와 갈등을 표현해 낸 작가의 실험정신이 돋보인 작품으로 높이 평가 받고 있다. 작품은 1930년대 금전 문제에 쪼들리던 예술인의 좌절감을 나타내는데 작품의 모티브가 된 인물은 박태원의 친구며 화가이기도 했던 비운의 작가 이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까페 방란장의 주인으로 본업은 화가이다. 돈을 벌기보다는 동료 예술가들이 모이는 장소로 쓸까하는 마음에 거금 300원 돈으로 카페를 차렸다. 자작(필명으로 추정)은 수제 형 축음기와 이십여 매의 흑반 레코드를 자진하여 이 다방에 기부하였고 만성은 크고 작은 칠팔 개의 재떨이를 들고 왔고 수경(水鏡) 선생은 아직도 그의 조그만 정원에서 한 분의 난초를 손수 운반하여 가지고 와서 이름을 방란장이라고 이름 지어 주었다.

첫 달엔 예상과 달리 장사가 잘 되었으나 그 이후부터는 손님이 뜸해졌으며 설상가상으로 옆 동네에 일천칠백 원여를 들였다는 동업 까페 ‘모나미’가 생기자 방란장은 여종업원 월급도 못 치를 정도로 가난에 쪼들리게 된다. 그 도 그럴 것이 모나미의 하루 수입이 평균 이십 원이 되는데 방란장은 하루 매상고가 이삼 원이나 그것도 안되니, 집세도 밀리고 식료품 값 , 전기세에, 종업원 '미사에'의 월급도 못줄 형편이다. 미사에는 방란에서 근무하는 여종업원인데 본래는 수경 선생의 집에서 일하던 하녀였으나 여자 종업원 하나는 있어야지 않겠냐는 수경 선생의 권유에 따라 10원 월급을 주기로 하고 데려왔다. 그러나 처음 몇 달만 월급을 제대로 받았고 그 이후로는 2년 가까이 월급이 아예 체불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불평불만도 없이 방란장에 계속 출근하여 주인공을 미안하게 한다.

수경 선생은 경영난에 시달리며 미사에의 월급도 못 치러주는 주인공의 의 하소연을 듣고는 차라리 그럼 미사에랑 결혼을 하라고 권한다. 그러나 주인공은 자신이 미사에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하고 생각해보지만 당장 가게를 쫓겨날 정도로 경제적으로 무능한 자신의 상태를 볼 때 꿈같은 생각이라고 자조한다. 일주일간 수경 선생을 보지 못한 것을 생각해내고 의식주 걱정이 없이, 얼마든 자기 예술에 정진할 수 있는 수경 선생의 처지를 한없이 부러워하며 수경선생을 만나러 가지만 그때 히스테리가 있다고 소문으로만 들었던 그의 부인이 쉴 사이 없이 종알거리며, 무엇이든 손에 닿는 대로 팽개치고, 깨뜨리고, 찢고, 하는 그 앞에 수경 선생은 완전히 위축되어 부인을 진정시키려 애쓰는 모양을 목격하고 거의 달음질을 쳐서 그곳을 떠난다.

이 작품에는 현실을 마주한 예술인의 슬픔을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하여 주인공의 고뇌를 쫓아가면서 읽는 감칠맛이 난다. 작품에 쉼표가 많기는 하지만 전체가 한 문장이라는 것은 대단한 시도이며 성취임에 틀림없다. 화가, 음악가, 문인 등 예술가는 극 소수를 제외하고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늘 가난했다. 그러나 예술가로써의 정신을 접을 수 없어 지금도 많은 이들이 어렵지만 자신이 추구하는 분야에서 열심히 매진하고 있다. 지금 세계적인 추세인 한류의 근원을 생각해본다. 우리 옷, 우리 노래, 우리 음식 등 이 모두가 우리의 예술에서 기인한 것이다.

1933년 동아일보에 ’반년 간‘이라는 소설을 연재 하면서 박태원은 직접 삽화를 그릴정도로 미술에도 관심이 많았고, 1933년 매일신보에 기고한 ‘문예시평’에서 “누구든 한 개의 소설가이기 전에 한 개의 문장가이어야 한다”고 말한 것을생각할 때 열정이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부인할 수없다. 그러나 글쓰기는 장난이 아니다. 그냥 아무 생각없이 써놓은 것이 시가 아니며, 문장의 나열이 수필이 아니다. 자신이 쓴 글에 책임감없이 작품이라고 하며 세상에 내놓는 뻔뻔함을 벗어나야한다. 근거없는 자신감으로 스스로 를 무장하는한 '개나 소나 시인이냐'라는 비아냥은 계속 될 것이다. 고통 없이 얻어지는 것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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