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야의 거시기 (巨詩記)-X/문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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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의 거시기 (巨詩記)-X/문정희

GOYA 0 154
의자를 조금 뒤로 밀치고
바닥에 떨어진 머플러를 집는다
조금 전까지 아내이던 그녀의 머플러를
조금 전까지 남편이던 그가 집어 준다

이혼 법정 차가운 타일 바닥에 떨어진
유실물 하나를
망각 하나를
반사적으로 집어 그가 그녀에게 돌려줄 때

그녀는 그것을 받아 자연스럽게
목에 두르고 있을 때

뭐야? 결혼 갖고 장난하는 거야
당신들 방금 이혼한 거 맞아

판사의 눈이 발끈하다가
이내 서류 쪽으로 넘어간다

욕설을 퍼붓고
서로 멱살이라도 잡아야 하나
왜 죄인 취급이지

둘은 동시에
모처럼 동시에 감정에 합의하다
그것을 혀 밑에 넣고 의자에서 일어선다

모든 게 끝났다
건물 밖으로 나오기 무섭게
폐기 서류처럼 반쪽으로 찢어진다
한쪽이 뜯겨나간 몸이 일순 휘청한다
햇살에서도 피가 흐르는 것 같다
조금 절뚝이는 발걸음으로
일렁이는 햇살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두 사람은 각자 제 방향으로
일단 첫걸음을 떼기 시작한다

---문정희 시집 {그 끝은 몰라도 돼}에서

♡시를 들여다 보다가

  의자를 뒤로 조금 밀친 채 떨어져 바라보면 보인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게 된 이유가 어찌되었건 함께 같은 방향으로 흐르던 부부의 발걸음이 이제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한다.그 시작이요 그 태동이 판사의 두드림에서 비롯되는데 어깃장으로 일관하던 의견이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로 합쳐지는 일관성에 의해 나눠지게 되었다.다른 것들에도 하나로 합쳐졌더라면 합함이 나눔의 이유가 되지는 않았을 터.서로에 대한 할 말이 많았기에 그 말들이 혀 밑에 있지 않았고 혀 위에서 날뛰며 무기로 변해서 심장을 긋고 마음을 건드려 상처가 되게 하였었다.
  굳이 나뉘는 의식에서야 혀 밑으로 눌러 대다니 그래놓고 제각기 갈 길로 가다니... 반 쪽이며 한 쪽이 뜯겨나간 몸으로 절뚝이는 발걸음으로 그렇게 갈 길을 걷고 있다니 그야말로 X며 X고 X이질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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