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식의 사랑 에세이 7

수필, 소설

민병식의 사랑 에세이 7

제임스 0 380

 2020 제17회 서하전국백일장 일반부 산문 차상 수상작

 

[에세이] 격리(隔離)
민병식

시계 바늘의 초침은 내게 정확한 사이즈의 규격을 요구한다. 아침에 눈을 뜨고 저녁에 눈을 감을 때까지 열심히 살거나 대충 살거나 일정한 거리를 왕복달리기 하듯이 오늘의 살아야할 분량은 늘 내 앞에 놓여있다. 직장생활 20년이 훌쩍 넘은 긴 시간의 사막을 어찌 매일 넘었을까 생각해보면 스스로 대견하기도하고 남은 주어진 시간을 또 어떻게 적응해야 하나의 문제는 나에게 매일 매일의 과분한 숙제이다.

입사하고 6년차 되던 해의 일이다. 매일같이 폭증하는 업무에 지쳐있었는데다가 상사까지 무척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그 사람의 갑질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어서 기획안을 결재 받으려면 하늘의 별따기였고, 계속 업무는 쌓여만 갔다. 업무시간에는 업무로 죽어나고 끝나고나면 업무 이외의 할 일이 또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머리가 지끈 지끈 아파오기 시작했고 우측, 좌측을 번갈아가며 오는 통증에 두통약을 달고 살아야했는데 그 무렵 회사 동기인 동료가 젊은 나이에 뇌종양으로 유명을 달리하여서 질병은 젊고 늙고의 차이를 두지 않는다는 것을 안 이후로 한동안 혹시 라는 불안감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해 12월에는 너무 두통이 심했고 시중 약국에서 파는 두통약을 먹어도 통증은 없어지지 않았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종무식 날 대학병원에서 머리 MRI촬영이 예약되어 있었다. 오전에 촬영, 오후에 검사결과 및 주치의와 면담시간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마치 관처럼 생긴 장치에서 꼼짝 않고 자기공명촬영을 하는 시간이 왜 이리 긴지 온 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한 느낌은 그런대로 견딜 수 있었지만 오후까지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혹시 큰 병으로 판명되면 어쩌나 하는 막연한 두려움은 상상에 상상을 더하고 입맛까지 없어 점심도 굶어가며 의사를 만나기까지 수십 년은 지난 듯한 기분이었다.

''뇌는 깨끗합니다. 큰 병은 아니니 걱정 안하셔도 될 듯합니다. 두통의 원인은 워낙 다양해서 저도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혹시 최근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나요? 아마 스트레스에서 오는 두통일 수도 있으니 약을 드시면 좋아지실 겁니다.''

의사가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하니 다행이었고 약을 먹어서 그런지 훨씬 개선되었다.


누구나 자신이 지고 갈 삶의 무게가 있는데 살아가는 한 내려놓을 수 없는 막중한 의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떨 때는 그냥 '탁' 내려
놓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목구멍이 포도청이니 직장을 그만 둘 수도 없고, 무엇인가를 새로 시작하는 것도 여건 상 쉬운 일은 아니어서 어깨가 뭉치고 허리가 쑤셔도 그냥 젖은 솜 뭉치 같은 짐을 메고 갈 수 밖에 없다. 그게 어른이고 그게 나의 임무이니까.. 하긴 누구의 삶은 그렇지 않겠나 싶다. 대기업에 입사해서 최고위직까지 올라갔다고 명퇴한 친구 녀석도 사법고시를 패스하고,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선배도 많이 벌고 적게 벌고의 차이는 있으나 큰 틀에서 보면 거의 비슷하다. 매일 같이 출퇴근을 하고 노동법상 정해진 이외에 더 일을 하고 주말에도 출근하는 일이 다반사며 원치 않는 회식에 가서 상사의 아재 개그에 억지웃음을 짓기도 하고, 상사가 골프를 좋아하면 골프를 배우고 등산을 좋아하면 갑자기 취미가 등산으로 변하는 부조리함을 당연하다는 듯이 여기며 살아간다. 그러한 날 들에게 잘 있으라고 인사를 하고 싶겠지만 자유인이 되기란 자신의 모든 혜택과 의무 내려 놓기 전에는 힘든 것이어서 오늘만 오늘만을 외치며 꾹꾹 버티어 온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혹자는 일자리가 있고 일을 할 수 있고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이 너무 행복하고 감사해야 한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말이 있듯이 요즘같이 어려운 시대에 내가 출근해서 앉을 자리가 있음에도 배부른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꿈많던 대학시절 연극을 좋아하고 청춘을 부르짖었던 패기에 찬 나의 모습은 어디에 있을까, 워즈워드의 낭만을 노래하고 바이런의 사랑을 찬양했던 열정은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를 생각하면 주말이면 늦잠 잘 수 있음에 감사하고 일요일이면 하루 종일 멍한 상태로 월요일이 오기를 극도로 거부하는 힘빠진 외거 노비가 된 나를 발견한다.

그러던 어느 순간 내가 시골길을 천천히 걷는 것을 참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고 그 속에서 나의 마음이 안식을 취한다는 것을 발견하였으며, 그것은 어린 시절 자연 속에서 성장했던 유년시절의 행복했던 기억들의 발로였음을 알았다. 그곳에서 꽃을 만나고 바람을 만나고 초록을 마주치고 워즈워드의 음성과 TS.엘리어트의 황무지를 건너 멜빌의 고래와 마아크 트웨인의 허클베리핀을 만나는 것이 내게 멀마나 많은 위안을 주는지..

나를 짓누르는 과도한 문명으로부터의 격리가 나를 행복하게 한다. 삶의 주인은 나다. 노비가 되는 것도, 노비해방을 하는 것도 어찌 보면 내 자신의 의지이니 가끔은 간이역에 내려서 나무의자에 앉아 하늘도 보고 꽃 내음을 맡으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번 주말에는 마음 쓰는 모든 것을 옆으로 치워놓고 꽃과 나무가 있는 숲에서 초록을 숨 쉬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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