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식의 사랑 에세이 2

수필, 소설

민병식의 사랑 에세이 2

제임스 0 352

2021 제9회 수원화성 글짓기 대회 전국공모전 일반부 우수상 수상작


[여행에세이] 나의 수원 화성(華城) 답사기

민병식



봄이면 벚꽃과 개나리가 흐드러진 팔달산, 지금이나 예나 서장대에 올라 바라보는 수원은 현대와 과거가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도시다. 서장대에 올라 바라보는 낮의 장엄한 모습과  밤에  보이는 달빛에 비친 잔잔한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는 것은 화성이 있었기에 가능하다. 이런 면에서 화성은 수원을 대표하는 얼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화성은 조선 정조 때에 쌓은 성으로 정조 18년(1794)부터 20년(1796) 사이에 영중 추부사 채제 공의 주관 하에 축성하였는데, 근대적 성곽 구조를 갖추고 있고 특히 정약용이 고안한 기계인 도르래의 원을 이용하여 작은 힘으로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는 장치인 거중기를 이용해 축성한 우리나라 성곽 건축 기술 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성으로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바 있다.


서장대에 1층에 걸려있는 시 현판도 새롭게 보였다. 1795년 2월 12일 정조가 친히 행차하여 성곽 건설과 서장대 건축물 등을 살펴보고 만족했다는 기록과 장용영 외영의 군사 훈련을 참관하고 친히 시를 지어 칭찬했다고 하는 내용이다.  동북각루는 너무 유명해서 별도의 설명이 필요없는 누정이다. 부제 명칭은 '방화수류정'이다.  중국 북송때의 성리학자인 명도선생의 '봄날 우연이 짓다'이란 시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유독 동북각루 에는 용두가 많다. 정조 임금께서는 화성 여러 곳을 돌아보고  친히 시를 짓고 편액을 하사했는데 1797년 1월 화성을 순시 하고 활을 쏘고 방화수류정에서 시를 지었다고 한다.


정조(正祖)의 여러 업적 중 하나가 수원 화성 축조라고 볼 수 있 는데 정조 대왕의 화성은 어떻게 구상 되었을까? 아버지 사도 세자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던 정조(正祖)는 아버지의 묘소를 좀 더 양지바른 곳으로 옮기고 싶어했고 그래서  서울 시립대 자리에 있던 사도 세자의 묘를 옮기고자 했을 때 새롭게 주목받은 곳이 바로 수원이었다. 당시 정조가 지관에게 어느 땅이 명당이냐고 물으니, 지관은 수원이 최고의 명당이라고 대답했다고 하며 정조는 사도 세자의 능을 '현릉원'이라 이름 짓고 수원에 600칸에 달하는 행궁을 지었다. 그리고 다음 해 현릉원과 행궁을 보호하기 위해 화성을 축성 하기 시작했으며, 수원성을 방비할 장용외영을 설치했다. 조선 시대에는 요역 이라는 것이 있어서, 국가에 큰 사업이 있으면 백성들은 무상으로 노동력을 제공해야 했으나 정조는 이들에게 임금을 지급했다고 한다. 아마 조선의 왕 중에서 최초로 임금 노동자를 고용한 고용주가 정조일 것이다. 건축 과정에는 축성 실명제를 도입하여 부정과 부실, 낭비를 배제했는데 창룡문 성문 근처에 있는 판석에는 감독관, 참여 부분 기술자 이름이 새겨져 있다.


화성이 목적대로 쓰이기 전에 49세에 세상을 뜬 정조, 화성으로 수도를 옮겨 새로운 시대를 열려고 했는지, 아니면 왕위를 순조에게 물려주고 은퇴 후 상왕 으로 막후 정치를 펼치려고 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정조 사후에 순조가 왕이 되자, 왕권은 위축되고 세도정치가 시작된 것은  사실이다.  그 후 정조의 효를 구현하고자 했던 화성은  지방의 한 평범한 성으로 남고 말았다.


성을 걷다 보면 황토 흙길 밟는 감촉이 좋고 사방의 소나무에서 피톤치트 향이 마구 뿜어져 나오는 것만 같다. 그 옛날 정조의 마음을 살짝 들여다본다. 뒤주에 갖혀 죽어가는 아버지를 그 어린 나이에 목격한 두려움과 죽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어떠했을까. 

정조 대왕은 어찌할 수없는 불가항력의 죄스러움을  화성에 쏟은 듯하다. 정약용이 개발한 거중기 덕분에 단 2년 반만에 완성이 되고 정조가 화성 행차 후 돌아올 때 이 고개를 넘으면  저 멀리 아버지 사도세자의 융릉 언저리가 보이지 않는다고 천천히 천천히 가자고 가마 꾼들에게 이야기한 지지대 고개를 비롯하여 화성행궁 에서 돌아오는 길에 하룻밤 묵는다는 과천의 객사, 남태령 고개만 넘으면 도성이 눈앞인데 행차를 멈추고 왜 하루를 쉬어갔을까 아마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또 발걸음을 멈추게 했을 것이다. '경치가 아름답고 마음이 따스한 곳'이란 의미로 정조 대왕이 과천객사의 이름을 '온온사'라고 붙여 주었다고 한다. 실제로도 재위 기간 동안 수없는 역모를 감내했어야만 했던 임금, 천수를 누렸다면 분 조선의 역사는 달라져 있을 것이다.


정조의 전부였던 화성을 걷자니 봄 비가 촉촉하게 내린다. 봄 비에 어두운 것들이 다 씻어지고 밝고 아름답고 좋은 것들의 일상이 움 터오기를 기대해본다. 가까운 곳에 가까운 감동을 주는  18세기 군사 건축물의 모범이면서 정치, 군사, 상업, 경제 기능을 모두 갖춘 성곽 신도시 전통 기술의 조화로움과 임금의 효 정신을한 경계 안에서 느낄 수 있는 곳, 화성을 걸으며 정조 대왕의 아버지에 대한 효심을 조금 이나마 헤아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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