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현의 오늘을 사는 이야기 4

수필, 소설

조용현의 오늘을 사는 이야기 4

소하 0 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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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현 시인. 수필가




매밀 범벅을 아시나요


      아름다운 시절 / 조용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면서 구수한 냄새가 나는, 

메밀 찜을 솥에서 큰 양푼에 꺼내어 담았다.

뜨거운 찜 덩이를 손으로 떼어서 버무리다 

콩가루를 묻혀 목으로 넘기면 둘이 먹다가 

한 사람이 죽어도 모를 만큼 맛있는 메밀 범벅이었다.

범벅은 메밀뿐 아니라 수수나, 보릿가루, 

또 는 다른 곡물을 이용해서 만들어 먹기도 했 었다.

그러나 주로 매밀 범벅을 만들어 먹었는데 

그 시절엔 먹을 음식이 모자라서 맛이 있었는지 모른다.

매밀 특유의 찷기도 없고 끈기도 없으면서 

곡식의 단맛도 덜 했지만 다른 곡물보다 흔해서 많이 먹었었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들녘에 나가 농사일을 할 수 없어서 집에서 간식거리로도 만들어 먹었다.

때가 때인지라 보릿고개를 넘기는 구황식품 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른 아침부터 들녘에서 농사일을 하면 봄 날의 하루해는 너무나 길고 지루했다.

팔다리, 허리까지 아프고 주린 뱃속에서는 여지없이 허기가 졌던 시절의 이야기다.


때는, 요즘 같은 봄날이어서 산천엔 산벚꽃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어  풍을 쳐 놓은 듯 아주 아름다운 고향 마을이었다.

드넓은 들녘에서는 푸르러 가는 청보리가 불어오는 봄바람에 

푸른 물결을 넘실거리고 논두렁 밭두렁엔 유채꽃 자운영이 꽃밭을 만들어 꽃동네가 되었다.


봄꽃들이 지천으로 피었어도 그 시절은 왜 그리도 배가 고픈 날이 많았던지 

지금에 와 서 뒤돌아보면 참으로 서러웠던 날들이었다.

지난해 가을에 수확해서 뒤주에 보관했던 쌀은 일찍이 바닥을 보였고, 

수수깡을 엮어 만든 고구마 뒤주도 봄날이 되면서 모두 동이 났었다.

당장 쌀이나 보리가 모자란다고 굶어 죽을 순 없어서. 

어머니께서는 지혜롭게도 식량 대용으로 매 밀로 만든 죽이나 범벅을 만들어,

온 가족이 요긴하게 끼니를 때웠던 날도 있었다.


남녘 나의 고향에서는 쌀이나 보리 농사를 지어 식량으로 먹고 살았다.

메밀은 가뭄이 들어 농작물 재배를 정상적 으로 하지 못할 때, 밭이나 논에 파종해서 수확했다.

메밀은 날이 가물어도 잘 자라서 산자락이나 천수답 같은 곳에 재배했다.

그러므로 메밀 역시도 전답이 없는 가난한 가정에서는 

그나마 구경도 못 하고 살아야 했던 시절이었다.


그 옛날 고향에서 먹었던 범벅은 흔적도 찾 을 수 없고 

보고 듣지도 못했던 새로운 음식 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메밀로 국수를 뽑아 막국수나 냉면을 만들어 먹는 것을 

서울에 올라와 처음 맛을 봤는데 아주 맛있는 별미였다.


식량이 모자라서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했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이젠 버젓이 건강식품으로 자리매김을 하는 걸 보니,

어쨋거나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잖은가싶다.

오늘같이 포근한 날엔 지질이도 어렵게 살 았던  그 옛날 나의 고향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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