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권의 의령 이야기, 기미년에 일어난 구여순과 만세운동

수필, 소설

김정권의 의령 이야기, 기미년에 일어난 구여순과 만세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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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 장날 이야기를 하면서 1919년 기미년의 의령 장날 의령의 정 기가 제대로 빛을 발했던 이야기를 안 할 수는 없겠다. 대한독립만세 의 함성이 전국을 뒤덮었던 기미년 3월 도대체 암흑 같았던 그 시기에 의령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잠시 그때로 돌아가 그 뜨거웠던 민족애와 나라 사랑의 굳센 의기 를 만나보자. 1919년 3월 14일은(현재는 3일 8일로 5일장) 의령 장날 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수많은 장꾼들이 모여들기 시작해 점심 무렵 에는 2천명으로 불어났으니 이들 대부분은 만세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장꾼을 가장한 사람들이었다. 오후 1시경 장터 안팎을 가득 메운 2천 여 명의 군중 앞에 임시 강단이 설치되고 대형 태극기가 하늘 높이 게 양되었다. 마침내 강단에 올라선 구여순은“조국의 자주독립을 쟁취 할 때가 왔다. 최후의 1인까지 싸워 빼앗긴 나라를 되찾자”라고 열변을 토했다. 사람들에게는 작은 태극기와 등사된 독립선언문이 일일이 배부되었다. 조용하던 의령장터는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으로 뒤덮였고 의령공립보통학교 학생들과 장터 밖의 읍민들까지 합세하면서 시위대는 순식간에 3천 명으로 불어났다. 이들은 장터를 빠져나와 읍내 를 돌면서 만세 시위를 계속하였고 경찰서 정문 앞에 이르러 마지막 으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高唱)한 후 해산했다. 이것이 기미년 의령 만세운동의 시작이었다. 구여순(具汝淳)은 의령읍 동동리 사람으로 1892년에 태어났으며 호는 일정(一丁)이다. 동동(東洞)은 본래 읍성의 동문 밖에 있는 동네라는 뜻의 동문동(東門洞)이었으나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군청이 있는 지역을 중동(中洞)이라 하고 그 동쪽과 서쪽을 각각 동동 (東洞)과 서동(西洞)이라고 한 이후로 동동리(東洞里)로 이어져 오고 있다. 1919년 2월 하순 구여순은 당시 서울에서 유학 중이던 누이동생 은득이 급환으로 입원했다는 전보를 받고 다음날 곧바로 상경 길에 올랐다. 그러나 은득은 몸이 아픈 것도 입원을 한 것도 아니었다. 먼저 독립운동에 몸을 담고 있던 은득은 고향에 있는 오빠 구여순과 이종 이화경을 독립만세운동에 참가시키게 위해 병을 핑계로 거짓 전 보를 보낸 것이었다. 만세 행렬과 고종 황제의 인산 행렬에 참여한 구여순은 3월 4일 두 누이동생을 데리고 고향 의령으로 돌아왔다.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의령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시작해야겠다는 결심이 서있었다. 운동에 필요한 자금은 이종누이 이화경이 조달하기 로 하고 자신은 평소 기상이 통하던 정용식을 찾아가 동지규합과 만세운동 계획을 의논하기 시작했다. 정용식은 강원도 사람으로 의령에 와서 병원을 개업하고 있는 의사였다. 이들은 최정학, 이우식, 김봉 연 등과 규합하여 정용식의 병원에서 세부적인 만세운동 계획을 의논 하고 마침내 의령장날인 3월 14일 오후 1시 장터에서 거사하기로 결 의하였다. 이들은 준비 작업을 분담하여 인근 면과 동리에 동원 연락 을 하고 비밀리에 태극기를 만들었다. 또한 용덕면장 강제형을 찾아 가 의거 계획을 설명하고 독립선언문 등사를 부탁하고 의령공립보통 학교 학생들에게도 의거에 참여하도록 비밀리에 연락을 취했다. 이때 부산의 일군 헌병대가 의령에 의거의 징조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일본 헌병 7명을 급파하여 조사를 하였으나 단서를 잡지 못하고 철수 하였다. 3월 4일 고향으로 돌아온 구여순과 동지들은 불과 열흘이라 는 짧은 기간 동안에 의령 만세운동을 착실히 준비해 나갔던 것이다. 3월 15일은 비가 내렸다. 전날 의거에 고무된 이들은 다시 비상 연 19/03/01 삼일절 추념식 1부 김정권의 의령이야기_21 락을 가동해 의령향교 앞에 군중을 모았다. 1천5백 명이 모였다. 이날 은 이화경, 이원경, 최숙자 등의 여성단체도 궐기하였고 의령군청 직 원과 의령공립보통학교 교사까지 의거에 참여했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를 시위하던 군중들이 군청을 거쳐 경찰서 앞에 이르렀을 때 왜경이 출동하여 총검을 휘두르며 군중을 해산시키고 구여순 등 10여 명을 검거했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오후 4시경 7백여 명이 다시 모여 경찰서로 몰려가 검거된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자 마산 의 일군 포병대대에서는 급히 일군을 급파하여 사태진압을 지휘한 후 이들은 총검으로 군중들을 해산시키고 주요 인사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다. 16일에도 군중들이 모여 시위를 계속하자 왜경은 진주에 있는 일군 부대의 지원까지 요청해 무자비한 탄압을 자행하자 시위는 더 이상 진전 확대되지 못했다. 사흘 동안 이어진 의령 만세운동에서 백여 명이 검거되었고 이 중 에서 30명은 끝내 재판에 회부되어 실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의령 만세의거는 인근 각지로 들불처럼 번져나가 부림면 신반리 의거, 지정면 두곡리의거, 칠곡면의거를 거쳐 3월 20일 화정면 덕교리 의거에 이르기까지 7일 동안 의령군 전체를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으로 뒤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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