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명호 시인의 도라지 수필

수필, 소설

하명호 시인의 도라지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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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귀양기(歸養) [수필]/하명호

                             

주문 요지;

1) 피고: 정약용(丁若鏞)

2) 아호: 다산(茶山)

3) 소속 정당

          ; 남인당 신서파

*주문:”본 법정은 피고 사이비 종교 '천주학쟁이' 정약용을 서울에서 천리 길인

경상도 포항 동해안 호미곶 (성선봉 감호소)으로 추후 재론 의견이 있을 시까지 귀양(歸養)을 명한다.”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기술 관료요 정치가, 기술사, 

실학사상가인 정약용 비서관이 요즘 들어 텔레비전 화면을 채운다.


오랜 이전 당시에는 무슨 문화 혜택이나 있었겠나?


《신유사옥(辛酉邪獄)1801

때는 220년 전 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801년 순조 임금 원년이라 국정 농단도 아니고 자기들 정당에 국민들은 몰이꾼으로

전략해 버린 모양새하고는 멀리 떨어진 시골에서는

거의 관심 밖이라 매일 토해 내는 뉴스거리가 그저 자기들 정파 싸움 형국이다.


계절은 우수 지나 경칩이 다가오는데 진눈깨비 내리는 그해는 유난히도 추운데 야밤에 불심검문도 아니고

천주교와 진보적 사상가와 남인들에 대한 정치적 반대세력에 대한 탄압을 위하여 가택 수색을 당하여

검찰 취조실(의금부)에 끌려가서 모진 고문과 취조를 마치고 관아에서 곤장 매100대는 기본이라

 (당시는 유배 길에 가기 전에 의무적으로 행해지는 장형)에 두드려 맞으니 무명 베옷이라

엉덩이 살은 피골이 상접하여 피에 짓이겨 묻어 나오고 있었다.


형틀에 묶이어 고문과 태형으로 이로 인해 일생을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했으니

그 해 2월도 마지막에 정든 고향 식속들 멀리하고 (법원 호송원)향리 포졸 아전들에 둘러 싸여

역마(驛馬)로 하루 80리는 가야되어 재갈 물린 말 잔등에 올라 먼지바람 일으키며 산골짜기 골목길 굽이 돌아서 간다

그나마 장가들 때 처가 장인이(군단장:중장계급) 병마 절도사라 재직 시 부(富)일정 부분 축적을 하여

두어 사위라고 일부의 토지 상속을 받아 그래도 귀향 여비는 국고로 충당하는 게 아니라

당시에는 자비로 충당을 하도록 명시가 되어 삼천리 길 먼 장도의 길에 오르니 한양 벗어나

살곳이 다리 건너 과천을 지나 남태령에 다다르니 사방에는 벌판으로 인적이 드물어

호박 밭에 구수하니 인분 냄새 코끝을 스치니 굽이치는 한강물 바라보며 이제는 언제 다시 돌아오나 십구나 한다.


다른 때 같으면 당나귀에 노새 말이 고작인데 그래도 장인 덕분에 호사를 누리니

호송차에 뒤따르며 몸을 맡기고 (집행관) 포졸들 앞세우고

길을 나서니 길가에 촌로들 혀를 끌끌 차며 측은하게 바라들 본다.


한양도성을 뒤로하고 삼일 만에 충주 부친 선영에 들러 하염없는 눈물 쏟아 두고는

나졸들의 재촉에 진눈깨비 내리는데 불어오는 매서운 이른 칼바람은 속살을 파고들어

그해  유난히도 추운데 출발 전에 서울 의금부 관아에서 버드나무 곤장 매에

두드려 맞은 몸도 상처 부위는 얼어 터지고 짓물리어

이는 동상이 들리었는가 온 삭신 뼈마디마저 수셔져온다.


문경 세제 뒤로하고 동남쪽으로 이동을 하여

유배지인 국토의 동남방 포항아래 호랑이 꼬리하니 장기곳이다.


조정에서 지시한 장소는 11일 소요 예정으로 이는 *영남대로

(서울-남태령-안성(죽산)-충주-문경-상주-함창-의흥-봉림

-신령-영천-포항(장기 곶 마현리(馬峴리)이 최종 도착 목적지이다.


오늘따라 한적하니 전통을 이어오는 신작로 길 가로변에 가든 음식점 전화통에 벌써부터 불이 난다.


어제 퀵 서비스 기사가 일을 마치고 가는 길에 내일 서울에서 거물급 고위 공직자가

무슨 비리 혐의가 있는지 모르나 저기 포항 쪽으로 유배를 당하여 간다 하니

중요 고객이라 서울서 내려올 것이니 영접 준비에 만전을 기하도록 하란다.


가든 식당 주인 내외와 알바 종업원들은 입이 함지박 만하여 바삐들 움직인다.


대문도 손을보고 마을 입구 청소도 말끔하게 새로 단장도 하고

행여 길에 흙 먼지 나리라 물청소도 확실하게 해 둔다.


정오가 가까워 오는 시간이라 길거리가 부산하다.


길가에 늘어선 인원 통제용 방어벽 정비하고 좀 있으니 요란하니

압송관 서리함께 말들의 대열은 흙먼지 일으키고

이내 주막 입구에다 말들 고삐 메어두고는 주점안으로 들어선다.


이미 향리 선비들 기관장들 도열을 하여 서울서 내려오는 인사를 영접하느라

명함들 건네기 바삐 움직이고 바로 식당 안으로 안내와 함께 들어간다.


아침부터 평소에 코빼기도 보이질 않던 기관장들도 아침 일찍 시골에

고급 가든 향토 음식점에다 음식들 푸짐히 준비를 하여 부산을 떤다.


이건 현지 시찰도 아니고 청송 감호소도 아니고 그것도 포항 장기 곳 호미곶이라

이래 중요 인사이면 헬기라도 타고 내려와야 는 거 아닌가?


도대체 누가 내려온다는 말인지 교통통제 요원한테 물어도

윗선에 지시라서 자기들도 누가 내려오는지 모른단다.


단지 아는 사실은 포항 가는 길에 이곳 식당에서 점심 식사들 하고 움직인다 한다.

조금 있으니 대형 유리 창문을 타고 쇠고기 굽는 냄새가 밖으로 나온다.


호송 요원들도 잠시 진한 여독을 풀어야하여 패랭이 모자 뒤로 제켜 두고서는

자기들 자리로 자리를 잡고 식사들 하고 있다.


여기서 멀지 않아 신령 완전동 역점은 15리길 근거리라

오늘 하루는 아마 그곳에서 유숙을 할 모양인가 보다.


이동에 따른 거리와 제한 속력은 일/80리로 정해진다.


이건 출발 할 때 사전에 정부 지침에 준해 정해진 규정이라 철저히 지켜야 한단다.


하여 서울서 도착지 장기면 장기초등학교 (성선봉감호소)까지 

460Km거리를 일정한 규정 속도로 나가야 한단다.


아울러, 도착에서 다음 행로까지는 관할 경찰서에서 철저하게

이동 동선에 따른 보고서가 작성이 되어 나중에 목적지에 도착하면 

Fax로 도착에 따른 사항을 기록 작성하여 최종 보고를 하도록 한다.


오늘은 이곳에서 숙박을 하고 아침 일찍 이동을 하도록 한다.


서울에서 출발한 지 열흘도 채 안 되는 3월 9일 목적지인 장기면에 도착이다.


이 곳 고을은 원님도 울고 나온다는 오지 중의 오지라 미리 엄포를 놓는 모양새이다.


후일 이 고장은 학문의 장을 만들고자 학교로 변신을 하니

벌써 내가 오기 일백 이십 년 이 전에 의암 송시열 선생 비롯

일백 여명도 넘는 수많은 이들이 이곳을 다녀갔으니

이곳은 조선시대 조정에서 영조 임금 이래 섬나라로 귀양을 금하여

칙령을 만들어 지정을 하니 중죄인으로

지정이 되는 관리들의 경상도 지방 최적의 단골 유배지이다.


이제 이곳에서 도착을 하여 (지구대)주재소에 도착 신고를 마치고

읍장이 지정한 곳으로 안내를 받아 행장을 풀고 이곳 주거 제한지

안가 (성선봉네 집)에서 서울에서 다른 지시가 있을 때까지

오지 중의 오지 어촌 마을에서 기거를 하도록 한다.


훗날 이곳 포항을 포함 장기면은 올곧은 선비의 지조를 이어받아

학문을 숭배하여 수양하고 지역 주민들의 학구열을 불태우고 해서

걸출한 많은 인재들이 배출을 하는 고장으로 거듭나게 된다.


유배지에서의 하루도 그렇게 지나가건만 동리 사람들 순박하니

지극 정성으로 대해 주었으니 그래도 흐르는 세월은 어찌할 수가 없으니

불혹의 나이가 들어서니 그래도 어쩔수없이 당신도 남자인고로,


다산이 하루는 가까운 어느 고을을 지나다 특이한 점을 발견하고

그 마을에 하루를 보내려 허름한 초가를 들어갔는데 

(말인즉슨 그 마을은 거의 전부가 아낙들로 마을이 이루어짐) 

진수성찬에 버금가는 상이 들어오고 이네 두 여인들이 다소곳이

예를 갖추어 식사를 하시는 다산을 바라보며

평소 마음속에 담아 둔 사연과 소원을 조심스레 털어놓는다. 


딸에 어머니인 듯한 분이셨어요.


식사를 하면서 다산은 그 여인네 소원이 자기 딸과

하룻밤을 지내 주었으면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산은 사연을 듣고 한참을 난감하게 생각하는 터에 마지못해 승낙을 하고

하룻밤을 묵고 떠나는 길에 마을 전체가 어업을 주로 하는 해변가

어느 어촌에서 벌어진 상황을 주시하고 남정네들이 고깃배를 타고

 바다에서 고기를 잡다 모두 해난 사고로 마을 전체가 자연 여인들로만

가득 그런 애뜻한 사연들이 다산에 마음을 사려 깊게 받아 그 마을 그 여인들은

외부에서 남자들이 오면 극진히 대접하고 아무 조건도 없이

자기 가정에 대를 있게 하는 너무나도 서글프고 안타까운

다산 정약용 전기에서 보면 "해사의 여인"에 언급이 되어진다.


여기에 다산 정약용이 포항 장기면 에서 첫 유배 생활을 하면서, 

장기읍성에서 자신의 처지를 은유적으로 표현해 쓴 시 <수(愁)>를 첨언해 본다.


[“칡넝쿨 푸르고 대추 잎 새로 나는 장기성 밖은 큰 바다

수심은 돌로 눌러도 또 일어나고 꿈길은 안개같이

희미하기만 하고 늦은 밥 더 먹지만 입맛이 있어 그럴까

봄옷이 도착하면 몸 한결 가벼울 텐데

이 생각 저 생각 모두가 쓸데없다

하늘이 칠정(七情)을 주어서 괴로워하네”]


언제부터 인 지 이백 년이 지난 현실 세계에서 실학자요 진보적 사상가인

다산이 떠오르는 건 신흥종교(천주교)의 도입으로 인한 혹세무민으로

당시 집권당 노론(老論)집권 보수 세력은 신유사옥을 구실로 주준모를 비롯한

천주교 신자 100여명 처형은 물론 정약용을 비롯한 진보적 사상가와 남인 등

정치적 반대 세력을 탄압을 하여 반대 정당의 집요한 세력다툼으로

애꿎은 희생양이 되어 먼 귀양의 길에 들게 된다.


이렇게, 다산은 전라도 강진 유배 생활에 앞서

포항 장기에서 이백 이십여 일 첫 유배 생활에 들어갔다.


후일 강진 17년 유배 생활에 비하면 짧은 기간이지만, 다산은 유배지 경상도 장기 읍에 머물면서

어촌마을 당시 한적하니 어촌 마을 백성들의 생활상과 아울러

완성한 의학 저술과 창작활동을 불태우고 고을 관리들의 목민행태를 글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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