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용 수필가의 바로크 음악과 추억

수필, 소설

박경용 수필가의 바로크 음악과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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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크 음악과 추억

                               

                     박경용


청소년 시절 친구ㅂ군을 따라  백화점 뒷골목 음악실에 다니곤 했었다. 

살아가기 어려운 시절 손님이 별로없는 음악실에서 

 해설하는 아저씨와 판 올리는 아가씨는 우리를 늘 반겨주었다. 

우리는 아가씨를 누나라 부르고 남자분을 아저씨라 불렀는데

우리가 신청하는 곡은 최우선으로 들려주어ㅂ군과 나는 기분이 매우 좋았다.

그 후 그 누나 소식은 모르겠고 아저씨는 훗날  교향악단 지휘자가 되신 걸 알았다. 

그런 인연으로 고전시대 음악도 들었지만

그 이전의 바로크 시대 음악도 즐겨 듣는 계기가 되었다. 

그 중에 해설과 함께 들은 샤콘느곡은  오래 기억에 남는다.

이 곡은 원래 남미에서 스페인으로 흘러 들어간 무곡인데

이태리 독일에서 기악곡으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바흐보다 22년 전에 이태리에서 태어난 비탈리의 샤콘느와 독일에서

태어난 바흐의 샤콘느가 오늘날까지 사랑을 받고 회자되고 있다. 

이 곡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곡으로 이름 지어져 있지만 나는 그말에 동의 하지않는다. 

너무나 아름답기에 슬픈 느낌이 드는  것이지 무조건 슬픈 곡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최상의 미는 슬픔을 동반함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리라. 

아름다움에다 포커스를 두어야지 슬픔에다 비중을 두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흔히 비탈리의 곡을 열정을 뜻하는 디오니소스(Dyonisos)적이라 하고

바흐를 이성적 요소라며 아폴로(Apollo) 적이라 한다고한다.


이것은 아마도 비탈리는 이탈리아 문화와 정서, 

바흐는 독일 문화와 정서의 배경에서가 아닌가 한다. 

여기에서 문학의 수필에 비유한다면 비탈리는 프랑스 몽테뉴를 원조로 하는 

미셀러니(Miscellany)에 해당하고 바흐는 

영국 프란시스 베이 큰을 원조로 하는 에세이(Essay)에 해당한다고 여겨진다. 

에세이는 지적이고 중후한 느낌의 글인데 비해

미셀러니는 정서적이고 서정성을 띤 글이기 때문이다. 

수필학에서는 몽테뉴를 원류로 하는 주관적 개인적인 유형을 informal essay 

혹은 personal essay, 경수필이라 하고 프랜시스 베이컨을 원류로 하는 

객관적 사회적 유형을 formal essay, 중수필이라고들 한다. 

국제화 시대인 오늘날 서구 대학과 사회는 formal essay에

비중을 두고 대학 입학이나 교육과정에서 중요시하고 있다. 

김진섭, 안병욱, 러셀 에머슨 등이 이런 글을 썼다.

경수필인 informal essay는 우리나라 수필의 대부분이

여기에 해당하는데 너무 기울어져 염려된다. 

요즘 질량이 부족한 글들에 의해 독자들이

외면할 수밖에 없는 오늘의 경수필 현실에 걱정하는 이들이 많다. 

문학에 단순 접목한다면 비탈리는 미셀러니

즉, 경수필에, 바흐는 포멀 에세이 즉 중수필에 가까운 음악이라 할만하리라. 

비탈리와 바흐의 곡을 자주 들으며 침잠할수록 이 말에 동의하리라 여겨진다. 

중복되는 말이지만 바흐의 곡은 비탈리에 비해 

중후하고 이성적이며 지적인 느낌을 주어 소위 로고스적이다.


나 개인적인 생각으로 바이올린 연주자로는 비탈리 샤콘느에는

하이페츠가 어울리고 바흐 샤콘느는 아튀르 그로 미오가 정석으로 여겨진다.

종교적인 색채에 비한다면 바흐는 가톨릭적 분위기이고

비탈리는 개신교의 분위기에 비한다면 무리일까.

비탈리의 샤콘느는 들을수록 휘몰아치는

열정과 화려함 비장감에 휩싸이고 바흐의 곡은 영혼에 깊숙한 중량감을 심어준다. 

두 곡 모두는 우리가 현실 생활에 시달리며 각박해지기 쉬운 마음들을 순화하고 고양한다. 

심미적 미감으로 기쁨에 차게 하고 천상으로 향한 정신을 고양하여

인간의 존엄성과 격을 한층 높이는 음악으로 가치를 발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비탈리 샤콘느적인 삶을 살 때도 있고 

바흐 샤콘느 색채로 살아갈 때도 있다. 

긴 세월 동안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은 그 사람의 성향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많은 세월이 지나 삶을 되돌아보며 누구나 회한을 가질 수 있는데 

비탈리 샤콘느형은 바흐를, 바흐는 비탈리 형을 살지 못한 것에 회한을 가지리라. 


그러고 보면 인생의 무게는 누구에나 대등한 것이고 이것이 삶의 본령이라 여겨진다. 

두 샤콘느가 오늘까지 회자하고 있음은 우리의 정신적 자산을 높이는데 도움이 된다 할 것이다. 

아무튼 비탈리와 바흐의 샤콘느는 우리 삶의 품격을 높이는 훌륭한 예술작품이라 하겠다.

이제는 할배가 된 나, 뒷골목 음악실에 함께 다니던

청소년 시절의 그 ㅂ 친구가 오늘따라 몹시도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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