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식의 사랑 에세이 22

수필, 소설

민병식의 사랑 에세이 22

제임스 0 227

2022 문학산책 공모전 우수상 수상작


[에세이] 마중물,  그 사소한 것의 고마움에 대하여

민병식


가끔 아니 종종 우리는 잊고 산다. 고맙거나 감사한 이들이 아니면 말을 거는 것도 듣는 것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옛말에 마당으로 내려올 정도로 맞이 한다는 말이 있지만 요즘 살아가면서 얼마나 반가히 맞이하며 살아가는가를 생각하곤 한다. 더러 잠기는 생각이란 이렇다. 일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누구에게 반기는 존재인가? 그도 아니면 누구를 반기고 살아가는가!


마중물이란 말이 있다. 가라 앚은 펌프 밑의 맑은 물을 끌어 올리기 위해 먼저 붓는 물을 일컫는 말이다. '마중'은 말 그대로 곧 나올 맑은 물을 미리 가서 데려온다는 뜻이다. 물이 필요할 때 마중물은 소중하지 않을 수 없다. 막막하거나 절실할 때 내밀어 주려는 도움은 무엇이라도 고맙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그 때문이다. 삶은 사람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고려할 때 마중물 같은 사람이 있기에 팍팍하고 고달픈 삶을 어루만져 준다고 믿는다. 우리가 그렇고 나도 그럴까? 너무 많고 흔하므로 사소한 건 아닐 것이다. 그런 것의 고마움을 잊고 있을 뿐이다.


늦가을 넘어 겨울로 가는 어느 날이었다. 늘 어제 같은 날이 이어질 것 같은 날이었다. 내게는 해당되지 않을 것이라던 것들이 뜻밖에 찾아오는 것들이 있다. 반갑지 않은 그건 코로나 19의 감염이다. 걸리면 며칠은 격리된다는 그것으로도 곤혹스러운 것이나 더 힘든 건 주위의 눈초리다. 정말 반갑지 않다. 조심한다고 해도 그렇다. 그러던 중 아는 이가 감염이 되었다.


'코로나 감염...격리...접촉 주의 요망...'


이 같은 문자에 당황했을 그를 생각했다. 깜짝 놀랄 겨를도 없이 잠시 먼저 '몸 건강하라'는 문자를 날려 보냈다. 위로대신 따가운 시선이 먼저 왔을 그이다. 그에게 보내는 몇 글자의 염려가 얼마나 그에게 위로가 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다음날 예정된 백신 3차 접종을 하였다.


"팔을 내미시구요. 잠시 따끔할 것입니다."

"네..."


간호사의 사무적 멘트였다. 무수한 사람들에게 주사를 놓았을 그녀다. '살살'이라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접종은 이루어졌다. 빨리 주사실을 나가기를 바라는 내게 간호사는 주사 맞은 부위에 위생 약솜과 함께 밴드를 붙여 주었다. 


"됐습니다. 다음 분!"


밴드, 또 다른 감염을 막는 것이다. 고마움이 묻어나는 다른 형태의 마중물이다. 다음날 하루를 쉬었다. 주사 맞은 쪽 팔도 뻐근하고 몸 상태도 별로라 더 쉬고 싶었지만 회사 컴퓨터에 일이 차곡차곡  쌓여 있을 것을 생각하니 출근해야했다. 일찍 일어나 세수를 하고 모닝커피 한 잔에 한기를 녹이고자 했다. 아침 여섯 시인데 밖은 아직 깜깜하다. 얼마나 추운지 가늠해 보기위해 거실 창을 열었다. '쌩' 하고 찬바람이 들이닥친다. '어이쿠' 하며 얼른 창문을 닫았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창문이 없었으면..!'


문득 어릴 적 고향의 겨울날씨가 생각났다. 내가 기억하는 그때의 겨울은 진짜 겨울답게 추웠다. 아침에 눈을 뜨면 코끝까지 내려오는 웃풍 때문에 이불에서 나올 수가 없었다. 등은 지글 지글 끓어 누워 있을 수가 없는데 얼굴은 시리고 창문에는 성에가 껴 있다. '후'하고 불면 입김이 연기처럼 위로 올라가던 방, 아버지는 구들에 문제가 있다고 하시면서 마을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구들장이를 불러 구들을 다시 놓았으나 새로 놓은 구들마저도 동장군의 기세를 꺾지는 못했다.


마당으로 나가면 펌프 옆 큰 양은 대야에 얼음이 꽝꽝 얼고 처마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졸린 눈을 비비며 뜰에 나서면  소스라치게 차가운 추위에 정신이 번쩍 나곤 했다. 옆집 굴뚝에서는 아침밥 짓는 연기가 폴폴 나오고 검둥이도 추운지 자기 집에서 눈만 껌벅거리며 웅크리로 나오지 않는 경우가 잦았다. 아버지는 간밤에 콩나물이 얼지는 않았는지 보러가시고 어머니는 돼지 아침을 주시기에 분주하셨다. 아궁이 솥에서 뜨거운 물을 퍼다가 대야에 담고 찬물과 적당히 섞어야 대야에 담근 양 손이 따뜻하였다. 그때는 온종일 밖에서 썰매를 타러 다니거나 산으로 들로 쏘다니니 손등이 터서 아물 날이 없었다. 겨우 고양이 세수를 하고 후다닥 방으로 뛰어 들어가 아랫목부터 찾는 것이 다반사였다. 까맣게 탄 장판은 손도 댈 수 없이 뜨겁고 온 가족이 밥상에 둘러 앉는다. 지금 생각해도 아득한 겨울 아침 풍경이다. 



우리 집 아랫목에는 늘 담요 한 장이 깔려 있었는데 동네 아주머니

들께서 놀러 오시면 수다의 장이 되는 모임터이며  손님이라도 맞으면 바로 상석이 되었다. 뜨끈뜨끈한 고구마에 살얼음이 얼어 이가 시릴 정도로 시원한 동치미를 참으로 놓으면 겨울 긴긴 밤은 이야기보따리가 되어 끝없이 이어졌고 나는 무슨 이야기 인지도 모르면서 어른 들의 대화에 귀를 쫑긋하고 듣곤 했다. 밖에서 놀다가 들어온 내게도, 마을 대소사를 전달하러 오신 반장 할아버지께도, 만두를 빚었다고 가져오신 옆 집 할머니에게도 아랫목은 꽁꽁 언 손발을 녹여주는 푸근한 정이었다. 따뜻한 아랫목, 찾아오시는 동네분 들, 그리고 겨울 주전부리들!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고 여겼을 것이나 지금 생각해보면 또 다른 형태의 마중물이었다. 아랫목과 담요 한 장, 그리고 훈훈한 정은 인심을 알게 해주었고 추위마저 막아주었으니 말이다. 그때는 몰랐을 그 꼬마아이는 벌써 중년의 나이가 되었다. 그때를 떠올리며 무심코 지나친 것들에서 마중물은 흔했다. 흔해서 귀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지나친 것이다. 간호사의 주사 접종도 그렇고 밴드까지 붙여준 것이 월급을 받고 하는 것이어도 그렇다. 그러한 사소한 것들이 우리의 삶을 지탱해왔다는 것이다. 감사하고 고맙고 반가워해야할 것이었다. 쌀쌀한 출근길에도 생각은 많아졌으나 훈훈한 것들로 채워졌다. 사뭇 고마운 것이 더 많이 사는 세상이다. 


출근한 사무실은 꽁꽁 언 강물처럼 을씨년스럽다. 온풍기를 틀어도 쉽게 찬 기운은 가시지 않고 코로나로 점철된 마음까지 무거워 진채로 겨울을 마주한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의 내 삶은 바쁨 자체가 목표였다는 생각이 든다. 생존을 위해서 오로지 바빠야 한다는 고정화 된 산업 사회의 의식이 지배하는 상황 하에 놓여 있었기에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조직의 부속품으로 소진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시간은 곧 돈과 성과라는 관념에 지배 되어 여가와 일이 분리되지 않은 의식 속에서 바쁜 것이 미덕이며 일의 양이 능력을 결정했다. 나의 젊음은 나무를 태우고 그윽한 숲의 냄새를 맡으며 은은하게 타올라 온 방을 환하게 뎁혀주는 고향마을 아궁이의 따뜻함이 아닌 증기 기관차를 쉼 없이 달리게 하는 끊임없이 석탄을 쏟아붓는 것과 같았을 것이다.


다소 이르게 온 탓일까. 사무집기를 정리해두고 동료 들이 올 때까지 잠시 시간이 있었다. 눈을 감았다. 지금은 어린 시절 고향 집에서 듣던 우리 집 검둥이 짖는 소리도, 양동이로 물을 실어 나르던 어머니의 잰 걸음 소리도 없다. 콧물을 질질 흘리며 들판에서 불을 쬐던 동무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세월은 유수와도 같고 아랫목을 데우던 나의 부지깽이와 앞산의 산토끼와 들판의 모닥불, 그리고 코흘리개 동무들의 모습은 욕실 천정에 베인 습기처럼 아련한 기억 저편의 그림이  되어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낮선 중년의 사내 앞에서 또 흘러간다. 


돌아보면 그렇다. 그 옛날의 겨울에는 마당에 있는 펌프가 얼어 마중물로 뜨거운 물을 붓고 얼음을 녹여서 빨래도 하고 목욕물을 데우기도 했다. 마중물이 없었더라면 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때 비교되는 것이 오늘 날이다. 특히 코로나 바이러스 로 인해 세상은 펌프 안에 고여 꽁꽁 얼어있는 물같다. 살기 어려운 세상은 어깨를 더욱 움츠리게 만들고 마음에 각을 세우게 하고 모가 나게 만든다. 따뜻함이 필요한 세월이다. 


오늘날은 추억이 있고 낭만이 있었던  그 옛날의 겨울은 분명 아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추운 겨울인 듯하다. 여기저기 살기 힘들다는 아우성과 코로나19와 싸우다 지친 한숨소리가 가득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겨울이 있어야 봄이 온다는 계절의 순환이 진리인 것처럼, 어려운 시기이지만 희망을 품고 견디어 내면 우리의 삶에도 분명 봄이 찾아올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봄을 위해 꽁꽁 언 땅 깊숙이 겨울잠을 자는 개구리처럼 우리의 겨울에는 희망의 싹이 숨겨져 있다. 지금의 겨울이 힘들긴 하지만 겨울은 씨앗을 품는 계절이고, 그 씨앗은 지금을 위한 것이 아니라 봄을 위한 것이니 힘든 이 시기도 바로 씨앗을 품고 틔울 준비하는 시련기일 것이다. 


하나하나 조그만 온기가 합쳐저 희망의 물, 사랑의 물이 콸콸 쏟아지도록 세상을 데우고 얼어붙은 마음을 데우고 추운 겨울을 데울 수 있다면 나부터 해야 할 것이다. 겨울의 강추위도  따뜻한 봄을 이길 수는 없듯이 힘들고 어려운 이 시기,  서로에게 따뜻한 마중물이 된다면 얼었던 펌프도 금방 녹을 것이기 때문이다. 절절 끓던 고향의 아랫목이 생각나는 것은 꼭 추워서만은 아니다. 온풍기가 없고 전기난로가 없었어도 담요 안으로 손을 녹이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감사했던 마음에 있다. 따뜻한  봄은 반드시 추운 겨울을 보내야만 온다는 진리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차가우므로 세상이 차가운 것이 아니라 사소한 것을 잊고 그 고마움을 반겨주는 마음을 잊고 있었다. 따스한 정에 목마름의 세월에 사소한 건 없다. 서로 마중물이 될 그 사소하지 않았던 것들을 생각하는 아침이 지나간다. 


이 생각에서 헤어날 즈음 동료들이 들어온다.


"굿 모닝! 춥지..."


동료의 얼었던 얼굴 앞에 커피를 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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