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완식 연재 詩소설 - 달맞이꽃(22)

수필, 소설

정완식 연재 詩소설 - 달맞이꽃(22)

방아 1 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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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그건 사랑이었네

 

 

뜻밖의 단호한 화수의 이야기에 약간 당황스러웠지만, 수연은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저한테 경계심을 나타내지 않아도 화수씨가 저한테 실망했다는 것을 저 역시도 알고 있어요.

 

화수씨를 이렇게 만들어놓고 뻔뻔하게 얼굴을 들이밀었다고 저를 나무란다고 해서 제가 뭐라 변명할 일이 아니란 것도 알고요.

그런데 제가 나서서 당분간 헤어져 있자고 먼저 얘기해 놓고 이제 와왜 여기 이 자리에 제 발로 찾아왔는지 화수씨도 한 번 생각해 봐주면 좋겠어요.

 

저라고 잘 지내던 화수씨와 느닷없이 헤어지고 나서 마음이 편했겠어요?

저도 화수씨에게 섣부른 이별 통보를 하고 나서 많이 후회하기도 했고 경황없이 화수씨를 보내놓고 나서 걱정도 많이 했어요.

 

시간이 늦어질수록 상처가 더 커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아직 무르익기도 전에 따버린 풋과일처럼 우리의 관계에 대해 너무 빨리 정리를 해버린 것에 대해 아쉬움도 컸었고요.

그리고 ..."

 

수연은 마치 항변이라도 하듯 화수의 단호한 태도에 맞서 자신의 심경을 길게 설명하면서 갑자기 감정이 벅차오른 듯 말을 마저 맺지 못하고 울먹였다.

 

 

뒤돌아가는 널

빠른 걸음이 아니어도

왜 쫓아갈 수 없는지

 

네가 지나간 자리

쌩쌩 날리는 찬바람이

수분 한 방울 없는 모래 태풍 같고

 

내가 만들어낸 노여움

사그라지지 않은 분노

어떻게 해야 용서가 되는지

 

알 수 없어

못난 나는

너를 붙잡지 못했다

 

- 너를 놓치고 -

 

 

마치 금방이라도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수연을 쫓아내기라도 할 듯 수연을 바라보던 화수는 울먹이는 수연을 보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눈에 힘이 풀리고 자신도 수연의 슬픔 속으로 빠져든 것처럼 가슴이 아려오는 것을 느끼면서 조금 전까지의 자신의 말과 행동이 진정한 본심이 아니었음을 자각하고 있었다.

 

화수의 수연에 대한 경계심은 어느새 눈 녹듯이 사라지고 없었다.

 

화수는 자신의 곁에서 머리를 숙인 채 흐느끼는 수연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것을 알아채고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손을 뻗어 수연의 어깨에 얹고는 아무 말 없이 살짝살짝 토닥여 주었다.

 

 

어느 날 문득

내 곁에 온 그대가  아니었음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숱하게 스쳐 간 바람의 숨결은

그대 불긋한 입술에 스며든

코스모스 바람개비처럼 화사했고

 

아른대던 시야에 든 햇살 한 줌은

그대 하얗게 빛나는 미소에 녹은

샐비어의 고백처럼 황홀했고

 

새벽이슬이 모여 흐르던 시냇물은

그대 맑은 눈동자에 빠져든

수줍은 샘물처럼 시원했습니다

 

바람처럼 햇살처럼 시냇물처럼

숱하게 내게 보내주었던

울림 있는 소식이었음을

 

어느 날 문득 뒤돌아보니

거기 우두커니 선 그림자,

늘 나를 바라보아 주던 그대였습니다

 

- 어느 날 문득 -

 

 

비 온 뒤의 땅이 더 굳어지는 것처럼  한 차례의 짧고도 굵은 이별을 겪고 난 뒤, 두 사람은 서로의 감정을 좀 더 확실하게 알게 되었고 그간의 만남이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래서 수연이 화수에게 하려던 말을 다 맺지 않아도 화수는 수연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그리고 화수의 토닥임이 수연에게 어떤 의미를 전달하려고 했는지 서로는 알고 있었다.

 

이윽고 수연이 울먹임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간이의자에서 일어나 자신의 어깨를 토닥여 주던 화수를 잠시 마주 보더니 아직 남아 있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침대에 앉아있는 화수를 와락 끌어안았고, 화수도 그런 수연을 한쪽 팔목에 주사기가 꽂혀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꼭 안아주었다.

 

 

으르렁대는 성난 파도라도

얌전히 안겨 잠드는,

엄마 품처럼 포근합니다

 

바람에 할퀴어 상처 난 바위라도

모래 한 톨까지 다 받아내는

대지의 평원처럼 넓습니다

 

혈육에 버림받은 탁란이라도

제 새끼처럼 살뜰히 품어주는

산솔새처럼 따뜻합니다

 

가슴과 가슴이 손을 맞잡고

창공을 오르는 날개옷 입고

마음과 마음이 하나로 이어집니다

 

- 포옹 -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어정쩡한 자세로 침대 위에 앉아있는 화수를 끌어안은 수연의 허리가 묵직해져 온다는 생각이 들 찰나에 병실 문이 짧은 노크 소리와 함께 벌컥 열렸다.

 

두 사람이 놀라, 얼른 서로를 안고 있던 팔을 풀고 문 쪽을 바라보니 간호사 한 명이 들어오고 있었고, 간호사는 분명 두 사람이 포옹하고 있던 것을 보았을 텐데도 별 신경을 쓰지는 않고, 화수가 있는 침대로 다가와 얼마 남아 있지 않은 링겔 주사액 밸브를 잠그고 익숙하게 화수의 한쪽 팔목에 꽂혀 있던 주사기를 제거해서 챙겨 들고는 다시 병실 밖으로 나갔다.

 

수연이 화수를 바라보며 머쓱한 표정을 짓자 화수는 그런 수연이 귀엽다는 듯 그녀를 보고 웃어주었고, 수연은 그런 화수를 보고 좀 전의 화수의 냉담했던 말투가 생각났는지 입술을 삐죽 내밀며 한 마디  했다.

 

"아까는 제게 냉정하게 돌아가 달라고 하더니 이제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렇게 살갑게 웃어 보이면, 제가 어떡하라는 거예요?

남자가 삐쳐서 여기까지 어렵게 찾아온 저를 문전박대나 하려고 하고 ..."

 

화수는 아무 대꾸도 못 하고 다시 수연을 보고 웃기만 했고, 수연은 승기를 잡은 검투사가 힘이 빠진 투우를 다루듯 여유 있는 표정으로 다시 한번 화수를 몰아붙였다.

 

"다음에 또 저를 보고 그렇게 화난 표정을 보이면 그때는 나도 가만 안 있을 거예요. 알았죠?"

 

". 알겠습니다. 누구 명이라고 거역하겠습니까? 이제 화 푸세요.

내가 옹졸하게 했던 거 정식으로 사과할게요. 다시는 수연씨가 서운하지 않도록 노력할게요.

그리고 내게 다시 돌아와 줘서 고마워요."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가졌던 서운한 감정을 말끔히 털고, 새로운 마음으로 사랑을 시작하기로 마치 약속이라도 하는 듯 서로의 눈을 마주 보다가 수연이 다시 화수를 끌어안았고, 두 손이 자유로워진 화수도 수연을 힘껏 안았다.

 

수연은 화수의, 화수는 수연의 품이 참 따뜻하다는 생각을 서로가 하고 있었다.

 

 

푸르던 가을 하늘에

천둥 벼락이 요란스레 찾아 왔다

 

온 세상을 떠받치는 하늘도

하루 저녁에 이리 변덕을 부리니

사람 사는 세상사는 더 그렇겠지

 

오늘 슬피 울었다고

내일도 서럽게 울기만 하겠나

 

하늘이 무너질 듯한 근심도

시간 지나면 언제 그랬냐며

눈 녹듯 사라지는 것처럼

 

가을밤 벼락 소낙비

오래가지 않아

 

희뿌연 안개 걷어내고 찾아올

가을 아침은 내일의 얼굴로

환히 웃으며 우리에게 오겠지

 

- 가을밤 소낙비 -

 

 

"저기 저 화병에 있는 꽃은 어때요? 화수씨가 좋아하는 꽃 중의 하나라고 누님이 일러 주던데...

누님이 참 자상하신 것 같았어요."

 

수연이 아직 상기된 볼을 한쪽 손바닥으로 감싸며 다른 한 손으로는 자신이 사다가 사물함 위에 올려놓은 화병을 가리키며 화수에게 물었다.

 

". 수연씨도 알다시피 제가 꽃이라면 다 좋아해요. 그래서 부산에 꽃구경 갔다가 수연씨도 만난 거고요.

 

그런데 저 노란 카라는 의미가 좀 남달라서 좋아했는데, 새 신부가 결혼식 때 부케용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장례식 때 사자에게 바치는 조의용으로 쓰기도 한대요.

인생의 새로운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결혼식과 인생의 마지막인 장례식에 같이 사용한다고 하니 기이하기도 하지만, 관장식도 이승을 뒤로하고 다음 세상을 열어주는 새로운 시작의 예식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되기도 하고, 끝은 곧 새로운 시작이니까 시작과 끝은 결국 다르지 않고, 단절이 아닌 이어짐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꽃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옐로 카라의 꽃말이 열정과 환희, 청정과 순수, 천년의 사랑이어요.

봄과 여름을 맞이하고 보내는 꽃이니까 우리가 만나고 지금까지 함께 한 계절을 저 꽃과 같이했다는, 아주 좋은 의미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꽃인 것 같네요."

 

"! 노란 카라에 그런 깊은 의미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듣고 보니 저 화병에 꽂힌 카라가 더 예뻐 보이네요."

 

민현숙도 그런 뜻을 가진 꽃이라는 걸 알고서 수연에게 들리어준 것인지는 몰라도 꽃을 좋아하는 화수가 노란 카라의 의미를 설명하며 두 사람의 사랑까지도 언급하자, 수연은 그저 고개만 끄덕이다가 화수에게 응답하듯 말을 건넸다.

 

그때 다시 병실 문 쪽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화수의 직장동료이자 친구인 박상헌 기사였다.

 

화수는 병실 안으로 들어서다 자신의 곁에 앉아있는 수연을 보고는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고 쭈뼛거리는 박상헌 기사를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하며 수연에게 소개했다.

 

"수연씨! 여기 이 친구는 제 친구이자 직장동료이기도 하고 이번에 제 원룸에서 앓아누워 있던 저를 구해줬다고 할 수 있는 박상헌 기사라고 해요.

그리고 이쪽은 내 여친, 서수연씨! 서로 인사 나누시죠"

 

수연과 화수의 친구인 박상헌이 인사를 나누는 동안 화수는 침대에서 일어나 사물함 문을 열고 거기에서 음료수를 꺼내어 두 사람에게 건네어 주었다.

 

"이 친구, 왜 이렇게 갑자기 얼굴이 환해지고 멀쩡해졌죠?

당장 내일 퇴원해서 다시 일을 시작해도 되겠는데요.

수연씨라고 했나? 여친의 방문이 여기 의사 선생님의 치료보다 훨씬 더 효과가 있나 보네요."

 

"하하. 안 그래도 여기서 더 이상 치료할 게 없으니 통원치료를 하라며 다음 주 안으로는 퇴원하라고 했대."

 

박상헌이 화수와 수연을 번갈아 쳐다보며 농담을 건네자, 화수가 웃으며 답을 했고, 수연은 한층 밝아진 화수와 친구인 박상헌의 대화를 들으며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서 화수를 보러 병원에 오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1 Comments
l인디고l 2022.01.19 11:08  
즐겁고, 재밌게 읽고 갑니다~
화수와 수연의 예쁜사랑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