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완식 연재 詩소설 - 달맞이꽃(19)

수필, 소설

정완식 연재 詩소설 - 달맞이꽃(19)

방아 1 416

6d8f57cda23bf3850ba66140929115ef_1639517344_56.jpg


19. 상실시대

 

 

잊으려고 잊은 건 아니었어요

떠나려고 떠난 건 아니었어요

잊으려 할수록 떠나려 할수록

선명하게 떠오르는 당신 모습에

상처 입은 기억이 슬퍼하네요

 

지우려고 지운 건 아니었어요

덮으려고 덮은 건 아니었어요

지우려 할수록 덮으려 할수록

선명하게 떠오르는 당신 모습에

상처 입은 기억이 울고 있네요

 

참으려고 참은 건 아니었어요

부정하려 부정한 건 아니었어요

참으려 할수록 부정하려 할수록

선명하게 떠오르는 당신 모습에

상처 입은 기억이 아파하네요

 

- 상실시대 -

 

온종일 찌푸린 얼굴을 하고 간간이 비를 뿌리던 하늘에는 아직도 낮은 구름이 빠르게 흐르며 달빛도 별빛도 다 가린 채,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어두운 수연의 가슴을 더 답답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평소보다 조금 늦게 퇴근을 한 수연이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향하는 언덕을 오르려고 발걸음을 막 떼었을 때 낯선 번호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매정하게 다른 사람의 부탁이나 의뢰를 끊어내지 못해 여러 번 곤란한 경험을 겪었던지라 평소 인터넷 스팸전화로 의심되거나 낯선 번호로부터 걸려오는 전화는 잘 받지 않는 수연이었지만,

분명 수연이 모르는 낯선 번호였지만, 왠지 안 받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수연은 핸드폰을 그녀의 귀 쪽으로 가져다 대며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에서는 예상했던 대로 낯선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혹시 서수연씨가 맞나요?"

 

". 그렇습니다. 실례지만 누구신지?"

 

". 저는 민현숙이라고 해요. 민화수의 누나.

초면에 이렇게 불쑥 전화해서 미안해요."

 

수화기 너머로 민화수라는 이름이 나오자, 수연은 마치 전기에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옮기던 발걸음 동작이 그대로 굳어버려 움직일 수가 없었다.

 

"! ~."

 

수연은 머리가 하얘지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아,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전날 한기호로부터 화수와 관련하여 조언을 듣고 나서 그렇지않아도 화수에게 전화해볼까? 아니면 카톡이라도 보낼까?’를 고민하며 전화하거나 문자를 보내면 무어라 말하고 어떻게 글을 적어야 할지, 고민을 거듭하고 있던 수연이었는데 이렇게 화수도 아니고 그의 누나가 불쑥 전화를 걸어오자 무슨 일인가 싶어 수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수연이 잠시 아무런 말을 못 하고 있자, 민현숙이 수연의 그런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시 말을 이었다.

 

"많이 놀라셨나 봐요.

이렇게 놀라실 줄 알았다면 문자로 먼저 인사나 나눌걸.

이렇게 갑작스레 전화를 드린 점에 대해 사과드릴게요.

정말 미안해요!"

 

민현숙이 재차 사과하자, 얼굴은 모르지만, 전화기 너머로 당황해하는 화수의 누나가 머릿속으로 그려지며, 이러고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한 수연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말을 했다.

 

"미안합니다! 제가 너무 놀라서 그만 실례를 범한 것 같습니다.

화수씨 누님이라니, 제가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언니라고 하겠습니다."

 

". 그렇게 하세요. 그렇게 불러주면 나도 편해요."

 

"고마워요! 그런데 어쩐 일로 제게 전화를 다...

혹시 화수씨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니겠지요?"

 

수연이 마음을 스스로 진정시키며 우선 그녀가 걱정하고 있던 화수의 상태가 어떤지부터 물어봤다.

 

". 지금은 고비는 넘긴 것 같아요."

 

"? 고비라뇨? 화수씨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요?"

 

수연이 다시 화들짝 놀라며 떨려오는 가슴을 그녀의 손으로 눌러 진정시키며 물었다.

 

"그렇게 물으시는 것을 보니 수연씨는 전혀 모르고 있었나 보네요.

모르고 있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겠지요. 사실은 우리 화수가 지지난 주 주말, 수연씨를 만나고 난 뒤 집으로 돌아와 사흘 밤낮을 앓았나 봐요.

그러다가 출근을 하지 않는 화수를 이상하게 생각한 직장 친구에 의해 경찰과 함께 원룸 문을 부수고 들어가 의식을 잃고 침대에 쓰러져 있는 화수를 발견했고,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되어 지금 치료를 받고 있어요.

화수가 의식을 회복한 건 입원하고 나서 다시 사흘이 지나서였고요."

 

민현숙의 얘기를 듣고 있는 수연의 심장은 그녀의 다른 한 손으로 가슴을 세차게 누르고 있긴 하였지만, 마치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처럼 심하게 요동치다가 그가 의식을 회복했다는 얘기를 듣고 나서야, 조금씩 진정이 되어갔다.

 

"언니! 어떡해요. 얼마나 아팠길래...

얼마나 놀라셨을까... 어쩌다 그렇게까지..."

 

수연이 말을 마저 잇지 못하며 안타까운 마음만 간간이 표현하고 있었다.

 

"제가 수연씨에게 전화한 이유도 그것 때문이에요.

화수가 정신적인 충격을 좀 크게 받은 것 같아서 지금 심리치료를 같이 받고 있어요.

 

그런데 제가 화수와 대화하다가 수연씨와 사귀다 이별했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고, 화수의 충격이 그 때문이 아닌가 하고 추정을 하게 되었는데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수연씨에게 더군다나 전후 사정도 모르면서 '전화를 해도 되나?'하고 고민을 많이 했었는데,

 

지금 화수의 심리상태가 많이 불안정하고 또 이번에 정신적인 충격을 꽤 받은 상태라 나중에 어떻게 될지 걱정이 되어서 수연씨의 도움을 좀 받으려고 이렇게 전화하게 되었어요.

 

수연씨 전화번호는 화수 핸드폰에서 알아냈고, 여러 번 망설인 끝에 실례를 무릅쓰고 전화를 드린 거예요.

제가 제 동생 일로 수연씨에게 무례를 범했는데, 다시 한번 사과할게요."

 

"아녀요. 언니는 동생 일이니까 당연히 그렇게 하셔야겠죠.

저라도 제 가족 일이라면 어떻게든 가족의 치료에 도움이 되게 하려고 아마 무슨 짓이든 했을 거예요."

 

"수연씨가 그렇게 얘기해주니까 고맙네요.

이렇게 수연씨와 얘기를 해보니까 수연씨가 따뜻하고 좋은 분이라는 것과 우리 화수가 왜 수연씨를 좋아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아요.

고마워요!"

 

"아닙니다. 제가 고맙다는 말을 들을 자격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화수씨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지?"

 

수연이 조심스레 민현숙에게 전화한 구체적인 용건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이는 수연 자신도 그동안 내내 화수가 마음에 밟혀 걱정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먼저 화수에게 이별을 통보했고 지금은 연민 반, 후회 반의 심정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던 차였는데, 마침 민현숙에게 전화가 와서 화수에게도 민현숙에게도 그리고 수연 자신에게도 도움이 될 방법을 묻고 있는 것이었다.

 

". 그건 전화상으로는 자초지종을 다 말씀드리기가 너무 복잡해서 제가 한 번 수연씨를 직접 보고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그렇게 한시가 급하다며 서둘러서 만나야 할 일도 아니고 하니..."

 

민현숙의 대답 중에 사정이 복잡하다는 말이 수연의 마음에 걸렸다.

 

". 그러시면 언니가 이곳 부산으로 오시는 것보다는 제가 이번 주말에 그곳으로 가서 언니를 만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제가 이번 주 토요일에 특별한 약속이나 바쁜 일이 없으니 이번 주말 아침에 여기서 출발해서 언니가 있는 곳으로 찾아뵐게요."

 

"수연씨가 그렇게 해주면 저는 좋지만 그러면 내가 너무 미안해서..."

 

"아녀요. 화수씨의 문제라면 언니 일이기도 하지만 곧 제 일이기도 하잖아요."

 

"알았어요. 안 그래도 제가 화수 병간호도 해야 하고, 또 나이 드신 아버지도 살펴봐야 해서 걱정했었는데,

수연씨가 수고해준다니 그러면 염치 불고하고 그렇게 하도록 할게요. 그러면 시간은 점심때쯤으로 하고 만날 장소는 내가 알아보고 나서 문자로 보내드릴게요. 고마워요."

 

민현숙이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고 나자, 수연은 그제야 멈춘 걸음을 다시 옮길 수 있었다.

신기하게도 오르막길을 오르면서도 수연은 걸음이 한결 가벼워졌음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바삐 누군가의 뒤를 추격이라도 하듯 빠르게 흐르던 먹구름도 언제 그 자리에 있었냐는 듯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가로등의 환한 불빛 사이를 뚫고 수연의 시야에 들어온 별빛 하나가 머리 위에서 유난히 밝게 빛나고 있었다.

 

 

눈 뜨고 눈 감고

매일을 오늘이라며 보내고

그제도 어제도 그랬던 것처럼

매일이 오늘이라며 온다

 

보이지 않았을 뿐

잎은 지고 나고

꽃은 지고 피고

 

보이지 않았다고

애초 없었던 것이 아니듯

지고 떠났다 해서

다시 오지 않는 것은 아니리라

 

- 별은 그 자리에 있었다 -




1 Comments
l인디고l 2022.01.19 09:59  
오늘도 즐독하고 갑니다~빨리 다음회가 보러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