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완식 연재 詩소설 - 달맞이꽃(18)

수필, 소설

정완식 연재 詩소설 - 달맞이꽃(18)

방아 0 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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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이별(離別) 후에



달 밝은 밤이면 빛바랜 별들이

잠시 몸을 숨기지만

네가 떠나가 버린 것이 아님을  알아


어둠이 두려운 사람들은

빛을 밝히고

어둠이 깊을수록 동트는 아침은 더 가까와져

언젠가 너도 다시 돌아올 것을 믿어


매일 황금같은 시간을

널 만나기 위한 대가로 지불하며

이별이 길어질수록

더 소중한 재회를 기다릴거야


긴 밤 지나고

소쩍새 눈 비비며 둥지 찾는 새벽녘이면

질퍽이던 찰진 어둠

거짓말처럼 걷어낸 햇살 돋듯


황조롱이 호버링 멈추고

서녘 하늘에 붉은 노을이 지면

굿거리 사랑가에 장단 맞추던

널 다시 볼 수 있을까나


- 이별(離別) 후에 -


"수연씨! 요즘 무슨 일이 있어요?

계속 표정이 굳어있고 안 좋아 보이는데...

오늘도 제가 옆에서 계속 지켜봤는데 무슨 큰 걱정거리가 있는 사람처럼 간혹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예요. 그냥 생각할 게 좀 있어서..."


퇴근 시간이 다 되어 컴퓨터를 끄고, 막 책상 정리를 하려는 수연에게 불쑥 말을 걸어온 한기호에게 수연은 무슨 잘못을 저지르다 들키기라도 한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서 말을 얼버무리며 퇴근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지 말고 저랑 저녁 식사라도 하면서 이야기 좀 해요.

옆에 있는 제가 불편해서 그래요."


한기호가 수연을 그냥 보내지 않을 것처럼 수연의 앞을 막아서며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안재덕 실장이 조금 전 퇴근하면서 행정실에는 수연과 한기호만 남아있던지라, 조용한 실내를 낮은 한기호의 중저음 목소리가 꽉 채우며 수연의 귀에 꽂혔다.

한기호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던 수연은 그의 눈빛에서 수연을 그냥 보내지 않겠다는 단호한 기운을 느끼고는 그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알았어요. 그렇게 해요. 저도 뭐 딱히 약속도 없었는데..."


수연은 한기호를 따라 캠퍼스를 가로지르는 도로를 나란히 걸어 내려와 학교 정문 앞의 한 곱창집으로 들어갔다.


접이식 샤시 도어가 확 열어 젖혀져 있고, 남녀의 학생들이 군데군데 둥근 원탁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아서 한창 웃고 떠드는 모습이 보였다.

오래된 일이지만 일전에도 한 번 한기호와 같이 들러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는 곳이었다.


"수연씨와 여기, 오랜만에 온 것 같아요. 그래도 수연씨 처음 행정실에 온 신입일 때는 가끔 같이 저녁 식사도 하고, 술도 한 잔 마시고 그랬었던 것 같은데..."


". 그러고 보니 그렇게 됐네요. 그동안 선배님께 제가 너무 무심했었나 봐요. 죄송해요."


"아니. 죄송할 것까진 아니고, 여하튼 지난번처럼 곱창에다가 소주도 한 잔 합시다. 괜찮지요?"


". 좋아요."


수연이 화장실에 잠시 손을 닦으러 간 사이, 한기호가 음식 주문을 하자 곧 테이블이 차려지고 불판이 들어왔다.

초여름의 길어진 해가 아직은 후덥지근한 바람을 만들어내고 식당 안으로까지 간간이 불어왔다.


"술잔은 먼저 뱃속에 곱창을 좀 채운 다음 비우는 걸로..."


수연이 자리에 들어오자 한기호가 그녀와 자신의 술잔에 술을 채우며 빈속에 술을 마시지는 말자는 의미로 말했다.


". 선배님 명을 따르겠습니다."


수연의 표정이 조금 전과는 달리, 많이 밝아 보였다.

자신을 위해 일부러 시간을 내 수연의 고민이나 기분을 풀어주려 하고, 자신을 걱정해주는 한기호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이 동시에 느껴져서 그를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제 먹어도 될 것 같네요. 이거 한 번 들어보세요. 맛있을 거예요.

제가 고기 하나는 잘 굽거든요. 하하"


집게를 들고 바쁜 손놀림으로 익숙하게 곱창을 굽고 있던 한기호가 수연 앞에 잘 구워진 곱창을 놓아주며 말했다.

학생 때는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다고 할 만큼, 스스로 학비와 생활비를 벌며 석사과정까지 밟은 한기호는 예전에 고깃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솜씨를 발휘하며 옛일을 회상한 듯 웃었다.


". 정말 맛있어요. 적당히 쫄깃하고 곱도 고소하고.

오랜만에 먹어서 그런지, 아니면 선배님의 곱을 다루는 솜씨가 좋아서 그런지 하여튼 최고예요."


수연이 젓가락으로 한기호가 앞에 놓아준 곱창을 입속에 넣으며, 한기호가 보란 듯이 그의 눈앞으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이제 한 잔 마셔도 되겠죠?"


". 한 잔 합시다."


몇 번을 한기호가 구워준 곱창을 입에 넣던 수연이 술잔을 들어 올리자, 한기호도 잔을 들어 수연의 잔에 부딪히며 입으로 가져갔다.

술이 한 잔 들어가자 두 잔, 석 잔 연거푸 마시게 되었고, 이윽고 한기호는 그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수연에게 질문했다.


"수연씨! 그런데 아까 내가 물었던 것 그거 있잖아요.

요즘 수연씨가 많이 표정이 어두웠다는 거,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요?"


"아니예요. 선배님!

그냥 제가 요즘 생각할 게 많아서 가끔 사념에 빠지곤 해요.

옆에 있는 선배님이 불편하셨다면 사과드릴게요."


"제 얘기는 수연씨의 사과를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수연씨가 왜, 무슨 일로 그렇게 고민하는지 궁금해서 그런 거여요.

제가 그 얘기를 들어야 할 권리가 있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고민하는 수연씨에게 제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수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한기호의 진심이 담긴 표정을 보고는 굳이 말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며 그의 질문에 대답했다.


"사실은 제가 근래에 우연히 집 근처에서 만난 사람과 교제를 했었어요.

경기도 수원에 사는 사람이었는데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몇 번 만나지는 못했지만, 참 성실하고 선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런데 저보다는 그 사람이 훨씬 더 적극적이었어요.

처음 제게 대시해올 때도 그렇고 그 이후, 네 차례의 만남에 있어서 특히, 카톡을 통해 보내오는 글에서 그가 제게 쏟아붓는 열정적인 감정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거든요.


저는 아직 확실하지도 않고 다만 그 사람이 선하고 좋은 남자라는 느낌 정도여서 천천히 알아가 보려고 했었는데, 자주 만나지도 못하면서 제 감정이 아직 정리가 덜 된 상태에서 자칫하다간 제가 그 사람의 감정에 휩쓸려 들어갈 수도 있고...

그리고 선배님도 잘 알다시피 제 사정이 지금 애매해서 그런 한가한 감정에 빠져있을 때가 아니잖아요?


고향에 계신 부모님들도 저 하나만을 보고 사시는데 더 이상 걱정을 끼쳐드리고 싶지도 않고, 제가 지금은 한가하게 남자를 사귀고 있을 때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거든요.

하여간 이런저런 복잡한 심경 때문에 사실은 지난 주말 그 사람이 부산에 저를 만나러 내려왔을 때, 제가 그만 헤어지자고 말을 해버렸어요.


그런데 그가 떠나고 난 뒤, 제 감정이 좀처럼 정리되지 않고 더 복잡해지는 거예요.

저도 확실치는 않지만, 그 사람을 좋아하는데 이렇게 쉽게 헤어지자고 한 게 잘한 일이었나? 싶기도 하고,

그 사람에게 너무 큰 상처를 준 것 아닌가? 싶기도 하고,

제가 부모님을 핑계로 대며 그의 진심을 저의 속물근성 때문에 내팽개친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제가 그 사람의 진심에 대해 너무 속단해 버린 건 아닐까? 싶기도 하고.

저의 헤어지자는 말에 그가 너무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는데 지금 괜찮은 걸까? 걱정되기도 하고,

그가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궁금하기도 한,


이런 복잡한 심경이 본의 아니게, 제 얼굴의 표정으로 나타나서 선배님까지 걱정하도록 만들었나 봐요. 미안해요!"


수연의 긴 설명과 자신에 대한 사과를 잠자코 듣고 있던 한기호는 수연의 말이 끝난 뒤에도 아무런 얘기를 할 수 없었다.


수연이 한 남자를 만나 그간 교제를 했었다는 것도, 그리고 그 남자와 이제 헤어졌다는 것도 한기호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어 그렇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수연이 자신의 현재 처지를 이유로 남자와 한가하게 교제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어서 그 남자와 헤어지자고 말하고는 지금은 헤어진 그 남자를 걱정하고 있다는 말은 한기호를 내심 적잖이 실망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사슴처럼 맑은 눈을 깜박이며

백옥같은 하얀 손을 내밀었던

연꽃같은 진흙 속의 그녀였다


싫은 나 자신을 닮아

은은한 나를 보는 것 같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그녀였다


좋아했지만 용기가 없어

사랑했지만 자신이 없어

가까웠지만 먼 그녀였다


- 가깝고도 먼 그녀 -


두 사람은 소주잔을 들어 입안으로 삼키고 난 뒤에도,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잔을 다시 채우며 한동안 침묵이 이어지는 듯했으나 곧 침묵이 어색해진 한기호가 입을 열었다.


스스로 수연에게 카운슬러를 자처하며 수연을 데리고 와서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듣고 나서도 아무런 말을 해주지 못하는 것은 경우가 아니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보아하니 두 사람이 헤어진 뒤로 그 남자분으로부터 수연씨가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한 것 같은데, 그토록 그 남자분이 걱정된다면 수연씨가 먼저 전화를 해서 그 남자 상태도 알아보고 좀 더 수연씨의 진심을 그 남자분에게 잘 설명해주거나 설득할 수도 있지 않겠어요?"


한기호는 이렇게 수연에게 얘기하고 나서 금방 자신의 내뱉은 말에 후회했다.


그동안 한 번도 자신의 수연에 대한 감정을 나타낸 적은 없지만, 한기호는 처음 수연이 그가 일하는 행정실에 들어서 안재덕 행정실장의 소개와 함께 인사하며 자신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부터, 그러니까 화수를 만나기 훨씬 이전부터 그녀를 내심 좋아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기호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수연에게 선뜻 나서서 좋아한다고 고백해 보기는커녕, 그동안 수연에게 데이트 신청도 한 번 못 했었다.

그런데 바로 옆자리에 있던 자신도 모르게 수연은 그동안 다른 남자와 사귀고 또 아픈 이별까지 했다며 자신에게 털어놓았다.


이 상황을 좋아해야 할지, 아니면 슬퍼해야 할지, 한기호는 수연의 이야기를 들으며 복잡한 심경 속으로 빠져들어 그녀에게 제대로 된 조언을 못 해주고 있는 상황에 대해, 스스로도 답답해하고 있던 차인데, 한기호는 불쑥 속에도 없는 말을 수연에게 조언이랍시고 내뱉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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