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완식 연재 詩소설 - 달맞이꽃(17)

수필, 소설

정완식 연재 詩소설 - 달맞이꽃(17)

방아 1 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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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상처, 긴 이별의 시작

 

 

내게로 오지 않아도 괜찮아

내가 가면 되니까


네가 한 발짝 뒷걸음 하면

내가 두 발짝 다가갈게


제발 내게

등은 돌리지 말아줘

안녕이라고는 말하지 마


- 부탁 -


수연과의 이별 후 화수는 3일 밤낮을 앓아누웠다.


그도 그럴 것이 화수에게 어느 날 문득 바람처럼 나타나, 불과 3개월 만에 화수의 모든 면에 있어 그를 변화시켜준 사람이 바로 수연이었기 때문이었다.


화수에게 기쁨을 주고 행복을 느끼게 해주고,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해준 사람이 수연이었고. 화수의 마음속으로 들어와 거의 대부분의 생각을 다 차지해버려서 그녀가 없으면 마치 공기가 없는 것처럼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그녀는 화수에게 큰 존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수연을 만나고 돌아온 토요일 저녁에 숙소에 들어서자마자 침대에 쓰러져 일요일과 출근을 해야 하는 월요일, 그리고 화요일 오후까지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있다가 전화조차 받지 않는 화수가 걱정되어 그를 찾아온 화수의 직장동료이자 친구인 박상헌 기사에 의해 경찰이 찾아오고 문이 부서진 다음, 시체처럼 침대에 누운 채 열이 펄펄 끓고 있는 화수가 발견되었고, 즉시 앰블런스에 실려 병원으로 호송되었다.


수연과의 이별의 후유증은 컸다.


응급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겨진 화수는 병실에 누워 링겔 주사를 맞으며,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그저 멍하니 천장을 응시하고 있거나, 같은 병실을 사용하며 출입하는 사람도,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드라마나 음악 소리조차도, 다 화수에게는 흑백의 무성영화처럼 스쳐 지나가거나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며, 그 역시도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어찌 된 일인지 소식을 듣고 달려온 그의 누나, 민현숙을 보고서야 화수는 소리 없이 눈물만 하염없이 흘리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는데, 놀랍게도 그의 입에서 나온 얘기는 눈앞에 서 있는 누나도, 그렇다고 자신에게 이런 이별의 상처를 안겨준 수연도 아니었다.


"엄마! 미안해!

엄마! 미안해!

엄마! 미안해!..."


화수의 갑작스러운 '엄마! 미안해!'를 반복해서 읊조리는 소리에 민현숙은 놀랐다.


그러나 화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민현숙은 곧 무엇인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표정을 하고는 그녀 역시 아무 얘기도 없이 누워있는 화수의 손을 꽉 잡아주며 그의 손등을 한동안 반복해서 쓰다듬어 주기만 했다.



내게로 왔던 그녀

잊고 있었던

그리운 사람이었나보다


내게서 멀어져간 그녀

잊을 수 없는

보고픈 사랑이었나보다


그녀에게서

그립던 사람이 보이고

보고픈 사랑을 찾았나 보다


달을 사랑했던 그녀는

그리운 사람이었다

보고픈 사랑이었다


- 그리운 사람, 사랑 -


"일종의 '해리성 기억 상실증'이라고 그랬었어요.


너무 어려서 당한, 너무 충격적인 일이어서 스스로 기억을 지운 것 같다고...


자기 눈앞에서 자신때문에 엄마가 사고를 당했으니 어린 애가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텐데, 어느 날 화수를 보니까 얘가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친구랑 어울리고 아무 일도 겪지 않은 애처럼 구는 거예요.


아빠와 저는 너무 갑작스러운 엄마의 죽음 앞에서 망연자실하고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한편으론 우리 화수가 밉기도 하고, 또 한편으론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그랬던 것 같아요.


그래도 좀 이상해서 동생을 데리고 병원을 가봤는데, 신경정신과 심리상담 선생님이 그렇게 진단했었어요. '해리성 부분 기억 상실증'이라고.

큰 문제 일으키지 않고 잘 커 줘서 고마웠는데, 단 한 가지 엄마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 못하고 있었어요.

그냥 사진으로만 엄마를 알아보고 다른 기억은 없는 것 같았어요.


근데 동생이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오늘 찾아온 저를 보더니 갑자기 '엄마! 미안해!'를 반복해서 이야기하더라고요.

마치 옛날 어릴 때 엄마의 사고를 목격한 것을 기억이라도 하는 것처럼."


민현숙이 스스로 마음을 진정시키며 화수가 입원한 종합병원의 심리학과 의사 선생님인 이갑재와 상담하며 옛날이야기를 꺼내 화수의 상태를 설명해 주었다.


"보호자님 얘기를 들어보니 그 심리상담 선생님의 진단이 틀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기억상실 증후군은 증상에 따라서 순행성 기억상실과 역행성 기억상실로 나뉘는데 민화수씨의 경우 역행성으로 볼 수 있고, 어릴 때의 큰 충격으로 그런 증상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해리성 기억상실은 외상으로 인한 경우나 심한 스트레스 상황을 겪었을 경우 등, 주로 심리적 요인에 수반해서 증상이 나타나는데 자신으로 인해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 가장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사고를 당했으니 스스로 이것을 부정하기 위해 해리 상태의 한 양상으로 기억상실 증상을 나타낸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런데 잠재의식 속에 남아있던 기억이, 어떤 것인지 제가 알 수는 없지만 이번에 다시 큰 충격을 받으면서 생각이 떠오른 것으로 보입니다.


정확한 것은 환자 본인과의 상담과 진료를 해봐야 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을 텐데, 현재 환자 상태가 좋지 않으니 우선은 본인이 좀 더 안정을 찾을 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갑재가 큰일이 아니라는 듯, 가볍게 진단을 내리며 좀 더 기다려보자고 하자 민현숙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진료실 밖으로 나왔다.


화수가 초등학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봄날 아침에, 화수를 데리고 학교로 가던 중, 하필 건널목 앞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느라 잠깐 화수를 잡은 손을 놓았는데, 그때 화수가 아직 신호등 신호가 바뀌지 않았는데도 앞으로 나갔고, 달려오는 자동차를 보고 화수 엄마가 몸을 날려 화수를 밀쳐내고 대신 자동차에 부딪히는 바람에 화수 엄마는 크게 다쳤고, 병원으로 옮겨진 화수 엄마는 치료 중에 결국 숨을 거두었는데, 화수는 그때의 충격으로 엄마에 대한 기억을 거의 다 잃다시피 했고, 그 후로는 아버지와 10살 터울 누나인 민현숙의 손에 의해 보살핌을 받고 자랐다.


민현숙이 심리과의 의사 선생님과 상담을 마치고 화수가 있는 병실에 돌아오자, 3인용 병실의 나머지 2개 침대를 차지하고 있던 환자와 보호자는 다 퇴원하고 없고, 병실에는 화수만 침대에 누운 채로 우두커니 천장을 응시하고 있다가 민현숙이 그의 곁으로 다가오고 나서야 인기척에 그녀를 쳐다보았다.


한쪽 팔목에는 여전히 링겔 주사가 꽂혀있었다.


"기분은 좀 어때? 배는 고프지 않아?"


"...... ....괜찮아.

괜히 나 때문에 여러 사람 걱정을 끼치게 해서 미안해. 아빠는?“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는 기피하면서 오직 누나, 민현숙하고만 말을 주고받던 화수는 어렵게 입을 떼긴 했지만, 정신은 말짱했다.


"아빠한테는 걱정하실까 봐 말씀 안 드렸어.

연세가 이제 여든이 넘어가니까 아무래도 기력이 많이 빠지셔서 곧잘 아프시거든.

그래도 드시는 것도 잘 드시고 그만하면 친구들에 비하면 건강하신 편이니 그나마 다행이지."


"누나가 늘 옆에서 잘 챙겨주니까, 고마워! 누나!"


"얘는, 고맙기는 뭐가 고마워? 내 아빤데 새삼스럽게."


화수의 아버지는 다니던 회사를 정년퇴직한 뒤로는 이제 연금으로 홀로 생활하는데 민현숙이 아버지가 거주하는 곳의 가까이에 있어서 매번 끼니 꺼리를 챙겨주고 있었다.


"그나저나 화수, 너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대. 어쩌다가 그랬니?"


민현숙은 화수가 위기를 넘기고 며칠간 아무것도 먹지 못해 기력이 없는 것과 무엇인가의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말고는 신체는 특별한 이상이 없다는 담당 의사의 말을 들은 터라, 화수의 상태를 살펴보고 이제는 괜찮겠다 싶어서 어찌 된 일인지 연유를 물어봤다.


"그게..."

화수는 머뭇거리며 대답을 멈추었다.


"괜찮아. 이 누나한테 못할 말이 뭐가 있니?

내가 널 업고 키우다시피 했는데.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없니?

정 네가 말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해도 되고."


그건 그랬었다.

민현숙은 화수 엄마가 사고로 돌아가시기 전이나 돌아가신 뒤로도 10살 아래의 어린 화수를 잘 보살펴주고 예뻐해서, 화수도 그런 누나를 잘 따르고 좋아했고, 고민거리나 상의할 일이 있으면 맨 먼저 누나에게 말을 하곤 했었다.


자신을 바라보며 조금은 서운한 표정을 짓고 있는 민현숙을 슬쩍 보고 미안해진 화수는 잠시 뜸을 들이다 누나에게 못할 말은 아니다 싶어 결국 털어놓기로 했다.


"사실은 지난 초봄에 부산에 갔다가 한 여자를 만났었어.

한 카페 옥상에 일몰을 보러 갔었는데, 거기에서 너무 강렬하게 내 눈길을 끌어당기는 여자라서 가만있을 수가 없어 다가갔는데, 다행히 그녀가 내 진심을 알아주어서 그동안 서너 차례 만나서 식사도 하고, 카톡으로 안부도 주고받고 그랬었는데 지난 주말, 다시 부산에 갔다가 거기서 갑자기 이별을 통보받았어.

  

내가 정말 좋아했었는데, 사랑한다고 제대로 고백도 못 해봤는데....

그래서 내가 충격을 좀 크게 받았나 봐.

미안해? 누나! 내가 못나게 굴어서.“

 

화수는 민현숙에게 여기까지 이야기를 하고는 누나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누나에게 못난 모습을 보였다는 미안함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다시 수연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조용히 화수의 얘기를 듣고 있던 민현숙도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이별을 당한 동생이 안쓰러웠는지, 화수와 같은 감정을 느끼고 교류하는 핏줄이어서 그런지 그녀의 눈가도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그때 고개를 젖히고 있던 화수가 그 상태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녀를 보고 오면 꼭 엄마가 생각나는 거야.

그래서 그녀가 엄마를 닮았나? 하고 엄마 사진을 찾아보니까 분위기나 모습이 비슷하긴 해도 꼭 엄마를 닮은 것은 아닌 것 같고....

이번에도 그녀와 헤어져 어찌어찌 집에까지 와서 침대에 누웠는데 그녀와 엄마가 자꾸 서로 오버랩되어 보이고...


온몸에서 열이 나고 힘이 빠져서 침대에서 일어날 수가 없어서 계속 그렇게 누워있기만 하다가 무의식중에 '이렇게 나도 엄마 곁으로 가는구나'하고 있었는데, 깨어나 보니 여기 병원이었어.

그런데 갑자기 엄마가 사고 나던 때가 떠오르고, 엄마에 대한 기억이 하나하나 생각이 났어."




1 Comments
l인디고l 2022.01.19 09:40  
에고,,,화수한테 이런 아픈이 있었네요.
너무 슬프다,,,,다음회차 기대합니다,,,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