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식 칼럼리스트의 흉터
민병식 칼럼리스트
수필 흉터
민병식
아파트 16층에서 1층까지 내려가 흡연을 하기란 여간 곤욕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 생각 저 생각에 하얗게 날을 새운 늦여름 새벽,
1층 정자나무에 기대어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일어나려던 중
갑자기 어지럼증을 느껴 중심을 잃으면서 넘어지면서 손에 상처가 생겼다.
이 정도 쯤이야 금방 났겠지 하고 들어오려는데 손과 팔 여기저기 지난 흉터가 보인다.
상처가 생기면 흉터로 남는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임에도 요즘은
상처 전용으로 사용하는 연고가 나와서도 그렇고 거의 치유가 되어 흉터조차 보이지 않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상처는 아물었음에도 그 상처가 커서
흉터를 남기기도 하고 또 어떤 상처는 병원에 가서 꿰매야 하는 커다란 상처가 있다.
문제는 어떻게든 아물기라도 하면 좋은데 어떤 상처는
그 상처의 골이 너무 깊어 아직도 치료가 필요한 상처가 있다.
바로 가슴에 남은 상처다. 그 상처는 겉이 아물어도 그 안에는 딱딱한 응어리가 만져진다.
더운 날에는 빨갛게 부풀어 오르기도 하고 따가운 염증이 생기기도 한다.
너무 깊이 새겨진 상처다. 칼에 베이거나 살짝 긁히기만 해도 쓰라리고 아픈데
깊이 새겨진 상처는 상상할 수 없이 아프고
다 나았다고 생각되어도 불쑥불쑥 흉터의 후유증이 올라온다.
시간이 흐르면 잊혀지는 기억 재생을 중지시키는 망각이라는 프로그램이
뇌에 없었더라면 모든 상처가 가슴에 남아 감당할 수 없는 고통으로 인간은
좌절과 후회의 바다에 허우적대다가 제 수명을 다 살 수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가슴에 남는 상처는 대부분 사람으로부터 받는다.
회사, 동료, 이웃, 고객, 심지어는 가족에게서까지,
그러나 사랑하는 연인으로부터 받는 상처는 치유가 된 것처럼 보여도 생각 외로 깊다.
세월의 흐름에 맡기고 나를 살다보면 모든 것을 잊고 사는 것 같아도
사랑에서 생긴 상처는 때때로 떠오르는 추억을 빙자한 원망, 서운함,
후회, 미움에서 출발해 그리움, 보고픔 등 아무리 좋았던 시간이었어도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아픔에 정신을 꽁꽁 묶어놓는다.
사랑의 아픔은 다른 사랑으로 치유한다고 하지만,
소고기 대신 돼지고기, 강남 아파트 대신 서울 변두리 아파트 같은
대체재나 보완재가 아니다. 그 사람이어서 사랑했고 그 사람이어서 행복했으며
그 사람이어서 가능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사랑으로 포장한 또 다른 사랑을 하길 원하기도, 아예 덮어놓고 쳐다보지 않으려고도 한다.
살기 위해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는 또 다른 변명으로 자기위안을 하면서...
사랑은 결실이 필요하고 그 결실을 위해서는 끊임없는 관심과
걱정, 노력, 용서, 화해, 다가감, 손 내밈 등이 필요하다. 지금 어렵고 힘들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은 처음보다는 끝을 함께 해야 한다.
그 어떤 경우라도 말이다. 손이나 팔에 상처가 생겼다고 해서 죽지는 않는다.
그러나 가슴에 생긴 상처는 영원히 아물지 않을 수도 있다.
그냥 그 상처를 피하려고 더 이상 덧나지 않게 하려고 계속 거즈로 덮어놓은
그 안에는 시뻘건 생채기가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인데,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사랑함에 왜 아픔이 없을까.
아파도 힘들어도 사랑하는 사람이 내 안에 들어있다면
상처를 보듬고 안쓰러워하고 서로 미안해하면서 딱쟁이가 지어 아물고
새 살이 돋아나 흉터는 생길지언정 먼 훗날
그 흉터조차도 따뜻이 감싸줄 수 있는 그런 사랑이었으면 좋겠다.
삶은 길다고 보면 길고 짧다고 보면 짧다.
벌써 한참을 지나온 삶의 뒤안길에서
생로병사의 세상을 살며 내 사랑조차 없다면 내 삶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