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랜컬쳐 이 달의 수필 * 정악 대금을 배우고 - 임성근

수필, 소설

포랜컬쳐 이 달의 수필 * 정악 대금을 배우고 - 임성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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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근 작가




정악 대금을 배우고



                     임성근

 

임성근 바람보다 조용한 소리를 따라 처음 대금을 손에 쥐었던 날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그날, 청산 선생님께서는 

숨결이 곧 소리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짧고 단순한 말이었지만, 그 뜻을 마음 깊이 새기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대금은 손이 아닌 숨으로 부는 악기 그 숨은 결국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몸으로 겪으며 조금씩 알아갔습니다. 처음엔 너무도 서툴렀습니다. 입김이 모자라 소리는 끊기고 손끝은 삐걱거렸습니다. 시켜보면 제대로 소리 하나 내지 못한 채 삐빅거리기 일쑤였고 

이거 그냥 자동차 경적 아닌가요?”

하며 누군가 웃어넘기면 그 말에 다 같이 키득이며 어깨를 풀기도 하며 선생님께

제발 저는 시키지 좀 말아달라

고 얘기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한 사람이 어느 날 또렷하고 맑은 소리를 내면 연습실 안은 순식간에 박수와 함성으로 가득 찼습니다.오오, 드디어 하나 됐다!”

감탄이 터졌고,

오늘은 고기 사야겠는걸?”

하는 익살스러운 말이 뒤따랐습니다. 그런 날은 마치 축제 같았습니다. 그 사람의 시간과 인내 그리고 마음이 울린 순간이었기에 모두가 함께 기뻐했습니다. 특히, 우리 반의 반장을 맡은 강반장님은 언제나 그 분위기의 중심이었습니다

오늘 대금이 아니라 내 숨이 울고 있는 거 같아

같은 그의 농담으로 늘 연습실안의 무거운 공기를 부드럽게 풀어주었고, 아직 초등학생인 막내 지현이는 맑은 웃음과 빠르게 늘어나는 실력으로 우리 모두의 귀감이었습니다. 지현이가 자연스럽게 소리를 뽑아낼 때면 우리는 놀람과 부끄러움이 동시에 밀려왔습니다

지현이 따라잡으려면 우리 모두 오늘도 밤샘이네.”

이런 말들 속엔 웃음과 경쟁 그리고 자극이 섞여 있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우리 모두는 분명히 달라졌습니다. 처음엔 손만 올려도 버거웠던 곡들이 조금씩 몸에 익었고 흔들리던 소리도 서서히 자리를 잡았습니다. 선생님께서

소리가 좋아졌네요

하실 때면, 그 짧은 한마디에 며칠간의 피로가 씻기듯 사라졌습니다. 또한 우리는 서로 간에도 스승이자 동료로 여기며 자연스레 조언도 주고받았습니다

숨을 조금만 더 길게 이어 봐요.”그 음은 살짝 늦게 들어가는 게 좋아요.”

그 말들은 날카로운 지적이 아니라 따뜻한 격려였습니다. 그리고 연습실 문을 나서도 연주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집에 돌아오면 짐을 풀기 무섭게 대금을 꺼냈고 틈만 나면 다시 연습을 반복했습니다. 저녁을 먹고 나서, 혹은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대금을 불며 하루를 마무리했습니다. 안방, 거실 구석, 베란다까지 연습 공간이 되었고,

또 불어? 뱀 나온다 그만 좀 해!”

참 징글징글하다는 가족들의 농담 섞인 잔소리도 들었지만 마음은 늘 대금으로 향해 있었습니다. 그만큼 간절했고 그만큼 좋아졌습니다. 밤늦게 수업이 끝난 날이면 자연스럽게 누군가 말했습니다.

출출한데, 오늘 술 한잔 하실래요?”

그러면 다들 기다렸다는 듯 짐을 챙겼고, 자주 가던 작은 식당에 둘러앉아 대금 이야기부터 각자의 삶까지 주고받으며 자연스럽게 친해져 갔습니다.

젊을 땐 나도 무대의 꿈을 꿨었는데 애들 다 키워놓고 이 길을 다시 찾았네요.”

그렇게 서로의 삶이 조금씩 스며들면서, 우리는 단순한 동료 그 이상의 존재가 되어 갔습니다. 서로의 기쁨에 박수치고 좌절엔 등을 두드려주는 가족 같은 사이가 되었습니다.몸은 점점 익어갔고, 마음은 단단해졌습니다. 어떤 날은 몸살에 관절 통증에 대금을 쳐다보기도 싫었지만 이내 다시 악기를 들었습니다. 그 길은 멈출 수 없는 여정이고 중독이었습니다. 소리가 흐려질수록 마음을 더 들여다봤고 울림이 선명할수록 고요함을 배웠습니다. 정악은 단지 음악이 아니라 내 안의 질서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그동안의 긴 여정의 끝자락에서 문득 돌아보니, 이 자리는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이었습니다. 선생님의 인내와 열정, 벗들의 진심 어린 격려, 그리고 수많은 나의 시간들에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다시 처음처럼 대금을 들어 올립니다


조용히 숨을 들이쉬고 마음을 담아 불어봅니다. 바람보다 조용한 소리를 따라 나는 다시 나의 길을 걷습니다. 오늘도 고요히 깊게 그리고 진심으로 대금을 불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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