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금선의 말하는 수필 23
나는 늑대를 보았다
박금선
나는
아홉 살쯤 되었고
동생 미선이는 네 살 터울이니
다섯 살이었다
할아버지 제삿날이었다
가족들은 제사를 지내려
큰집으로 갔다
식구들이
워낙 많으니 큰 집 눈치가 보여 다 데려가지는 못한다
언니
오빠들만 가고
동생 미선이와 나는 집에 남아 있었다
따라가고 싶지만 갈 수가 없었다
큰아버지가
성격이 고약해
자식들 떼 거지로 줄줄 달고 다닌다고
잔소리를 하시기 때문이다
어쩌다
큰집에 생일 밥이나 제삿밥을 먹으러 가면
어머니는 누가 볼까 봐
미안함이 묻어나는
붉은 볼과 바쁜 눈빛으로 우리가 흘린 밥풀떼기 줍기에 바빴다
얼른 한 숟갈 먹이고는
집으로 돌려보냈다
제사를 지낼 때도 순서가 틀리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고함에 올케들은 주눅이 들어 순서를 더 까먹곤 했다
막걸리를
참 좋아하셨고 술을 드시면 큰 목소리에 명치미골의 산재 바위가 흔들거렸다
별명이 경찰이었다
그래도 어머니는 유머와
재치로 큰아버지와 마음이
잘 맞았다
큰아버지가
무서워 큰 집 쪽으로 가지 않고
멀지만, 앞 냇가 쪽으로
뺑 둘러서 가는 때가 많았다
큰아버지 눈에 뜨이면 막걸리
심부름이나 일을 시키기 때문이다
우리 집은
동네 제일 위쪽 끄트머리에 있었다
산이랑 가깝고 외진 곳이었다
밤이 되면
고라니 노루 부엉이
산 짐승 울음소리를
많이 듣고 자랐다
음력
보름 전후였나보다
달이 있어 대낮처럼 환했다
눈이 많이 내려
마루에도 수북이 쌓였다
식구들이
큰집으로 가고 없으니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미선이를 팔에 눕히고 꼭 안고
자려고 하니
마루에 이상한 소리가 났다
너덜너덜 떨어진 문풍지가
이상 야릇한 냄새와 바람을 일으키더니
방문 너머로
큰 그림자가 휙 지나갔다
무서웠지만, 용기를 내어 문구멍 사이로 밖을 내다봤다
개보다 덩치가 큰 짐승이
마루에 쌓인 눈 위로
큰 꼬리를 흔들며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녔다
늑대였다
무서워
철도 나지 않은 동생을 얼른 깨웠다 소리를 지를까 봐 입을 틀어막았다
동생은
작은 문고리 줄을 잡게 하고
나는 큰 문고리 줄을 잡아당겼다
큰 문고리에 달린 끈으로 내 손목을 한 바퀴 두르고
또
작은 문 돌축을 한 바퀴
뺑 둘러 묶었다
공부는
못했지만 그래도 내 또래
친구들보다 힘이 세고
일머리는 잘 돌아갔다
발톱으로
문 살을 드르륵 긁을 때는
"아, 우린 오늘 제삿날이구나."
"저 짐승한테 잡아 먹혀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이
라고 해 봐야 군데군데 문살이 일그러져
늑대가 으르렁하고
달려들면 단번에
부서질 거라 생각이 들었다
한 번을
긁고는 더 긁지는 않았다
식구들이 올 때까지
있는 힘을 다해
문고리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하품을 하며
졸고 있는 동생의 살을 꼬집어
잠을 깨우기도 했다
추운
겨울인데도 땀이 나 물에 빠진 생쥐 같았다
무서워 밖을 내다볼 용기도 나지 않았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식구들이 돌아왔다
그때야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짐승 생김새를 자세히 말하니
늑대라고 했다
짐승들이
눈이 오면 먹을 게 없으니 배가 고파
민가로 내려온다고 했다
내가
태어나 제일 무섭고 기억에 남는 날이다
지금도
그 늑대가 내 눈을 바라보며
꼬리에 묻은 눈을 털며 방문 앞을 걸어 다니고 있다
그러나 이 글을 쓰다 보니 의문이 생긴다
그때 내가 본 그 늑대가
늑대가 맞을까?
우리나라에 늑대가 멸종된 지
오래되었다고 한다
일제시대 이후로는 늑대가
없었다고 한다
내가 본 건 늑대가 아니었을까?
몇십 년을 '나는 늑대를 봤다' 고
자랑하며
떠벌리고 다녔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