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랜컬쳐 낭송 모음집 2

포랜컬쳐 낭송 모음집 2

소하 0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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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렬 등 미교정 상태로 곧 교정 들어감.




김소월을 가르치다 보면

 

: 곽재구 


정주 곽산 영변 이런 지명들이

강진 해남 마산 이런 지명들과 맞부딪칠 때면

그 속에는 어린 시절 봄 들판의

어느 아지랭이보다 뜨거운 현기가 숨어 있다

김소월을 가르치다 보면

아이들은 낯선 지명에도 눈빛이 빛나고

지금은 죽어 한 줌 진달래빛 흙가루나 되었을

한 병약한 북녘 시쟁이의 고향과 추억에

그들의 어린 귀와 가슴의 문을 열어젖힌다

마른 북어처럼 어눌한 저들의 국어 선생이

맹렬히 침을 튀기며 눌변을 이을 때

아이들은 은빛의 몸을 퉁기며

압록강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은어떼가 된다

쏟아지는 햇살의 추억을 뚫고

뗏목 위에 우뚝 선 조선 사내의 가슴팍을 스치기도 하다가

달구지에 어린 것 헌 솥 이불짐 올려 두고

눈발 속을 떠나가는 일가족을 만나기도 하다가

늦핀 개마고원 참꽃 떼거리를 기웃거리기도 하다가

꽃잎 새로 배시시 웃는 젖통 큰 산가시내의 얼굴을 붉히게도 한다

김소월을 가르치다 보면

아이들의 추억과 따뜻한 피 속에는

따로 세워진 40개의 눈물기둥은 없다

만질 수 없는 시간의 벽과 증오와 절벽도 없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북녘 사내의 낡은 사진과

오래된 싯구 속에서 남녘 아이들의 눈빛은 빛나고

아이들의 피는 쿵쿵 튀어 올라

약술에 취한 듯 저들의 어눌한 국어 선생은 오늘 기분이 좋다.

 

출처;곽재구 시집전장포 아리랑14~15(민음사1985년 초판,1988년 중판)

 






직소포에 들다

: 천양희 

 

폭포소리가 산을 깨운다.

산꿩이 놀라 뛰어오르고 솔방울이 툭, 떨어진다.

다람쥐가 꼬리를 쳐드는데 오솔길이 몰래 환해진다.

 

! 귀에 익은 명창의 판소리 완창이로구나.

 

관음산 정상이 바로 눈앞인데

이곳이 정상이란 생각이 든다.

피안이 이렇게 가깝다

백색 정토淨土! 나는 늘 꿈꾸어왔다

 

무소유로 날아간 무소새들

직소포에 하얀 물방울들, 환한 수궁水宮.

 

폭포소리가 계곡을 일으킨다.

천둥소리 같은 우레 같은 기립박수소리 같은 바위들이 몰래 흔들한다

 

하늘이 바로 눈앞인데

이곳이 무한천공이란 생각이 든다

여기와서 보니

피안이 이렇게 좋다

 

나는 다시 배운다

 

절창絶唱의 한 대목, 그의 완창을.

 

출판사: 시인생각

 




만세로 가득찬 사나이

 

: 허영자 

 

기미년 31일 우리나라 천지는 만세! 만세! 만세!로 가득 넘쳤습니다.

산도 바다도 강물도 뭇 짐승 초목들도

만세! 만세! 만세!로 우줄거려 춤을 추었습니다.

만세를 잡으려고 일본 순사의 구둣발이 달려오고 만세를 꺾으려고 번뜩이는 총검이 달려오고 그러나 만세 만세 만세는 구둣발도

총검도 아랑곳 없이 도도히 도도히 흘렀습니다.

그날밤 자정에 한 사나이가 경찰서로 잡혀 왔습니다.

흰 무명 바지저고리에 지게를 짊어진 농군이었습니다.

순사의 노한 눈길이 사나이를 노려 보았습니다 그 보다 더 노한 형형한 눈길이 유치장 창살 너머로 순사를 노려보았습니다.

지게꾼 사나이는 유치장 마당에서 만세를 외쳤습니다.

순사는 사나이의 지개막대기를 빼앗아 사나이를 마구 때렸습니다.

때리면 때릴수록 맞으면 맞을수록 사나이의

만세 만세 만세는 더 우렁차고 높았습니다.

바보 같은 녀석! 만세를 안 부르면 안 맞을 것 아니냐

순사가 씩씩거리며 뇌었습니다. 그러자 그 대답은 이랬습니다.

이 녀석아 내 속에는 지금 만세가 가득 차 있다

네가 때릴 때마다 내 속에 가득 찬 만세가 튀어나오누나

이 호통소리 하나에 순사는 혼비백산 유치장은 갑자기

만세! 만세! 만세! 눈물로 목메인 만세로 넘쳤습니다.

박순천 할머니로부터 들은 이 '만세로 가득찬 사니이' 이야기를

나는 보물처럼 소중히 늘 가슴에 새겨두고 있습니다.

 

 

출처 : 다음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 박노해 

안데스 산맥의 만년설산

 

가장 높고 깊은 곳에 사는

 

께로족 마을을 찾아가는 길에

 

희박한 공기는 열 걸음만 걸어도 숨이 차고

 

발길에 떨어지는 돌들이 아찔한 벼랑을 구르며

 

태초의 정적을 깨뜨리는 칠흑 같은 밤의 고원

 

어둠이 이토록 무겁고 두텁고 무서운 것이었던가

 

추위와 탈진으로 주저앉아 죽음의 공포가 엄습할 때

 

신기루인가

 

멀리 만년설 봉우리 사이로

 

희미한 불빛 하나

 

산 것이다

 

어둠 속에 길을 잃은 우리를 부르는

 

께로족 청년의 호롱불 하나

 

이렇게 어둠이 크고 깊은 설산의 밤일지라도

 

빛은 저 작고 희미한 등불 하나로 충분했다

 

지금 세계가 칠흑처럼 어둡고

 

길 잃은 희망들이 숨이 죽어가도

 

단지 언뜻 비추는 불빛 하나만 살아 있다면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세계 속에는 어둠이 이해할 수 없는

 

빛이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거대한 악이 이해할 수 없는 선이

 

야만이 이해할 수 없는 인간정신이

 

패배와 절망이 이해할 수 없는 희망이

 

깜박이고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그토록 강력하고 집요한 악의 정신이 지배해도

 

자기 영혼을 잃지 않고 희미한 등불로 서 있는 사람

 

어디를 둘러 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

 

무력할지라도 끝끝내 꺾여지지 않는 최후의 사람

 

최후의 한 사람은 최초의 한 사람이기에

 

희망은 단 한 사람이면 충분한 것이다

 

세계의 모든 어둠과 악이 총동원되었어도

 

결코 굴복시킬 수 없는 한 사람이 살아 있다면

 

저들은 총체적으로 실패하고 패배한 것이다

 

삶은 기적이다

 

인간은 신비이다

 

희망은 불멸이다

 

그대, 희미한 불빛만 살아 있다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출처: 박노해 시집 2010, 느린걸음(발행처)

 



 

방을 얻다

 

: 나희덕 

담양이나 창평 어디쯤 방을 얻어

다람쥐처럼 드나들고 싶어서

고즈넉한 마을만 보면 들어가 기웃거렸다.

지실마을 어느 집을 지나다

오래된 한옥 한 채와 새로 지은 별채 사이로

수더분한 꽃들이 피어 있는 마당을 보았다.

나도 모르게 열린 대문 안으로 들어섰는데

아저씨는 숫돌에 낫을 갈고 있었고

아주머니는 밭에서 막 돌아온 듯 머릿수건이 촉촉했다.

-저어, 방을 한 칸 얻었으면 하는데요.

일주일에 두어 번 와 있을 곳이 필요해서요.

내가 조심스럽게 한옥 쪽을 가리키자

아주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글씨, 아그들도 다 서울로 나가불고

우리는 별채서 지낸께로 안채가 비기는 해라우

그라제마는 우리 집안의 내력이 짓든 데라서

맴으로는 지금도 쓰고 있단 말이요,

이 말을 듣는 순간 정갈한 마루와

마루 위에 앉아 계신 저녁 햇살이 눈에 들어왔다.

세 놓으라는 말도 못하고 돌아섰지만

그 부부는 알고 있을까.

빈방을 마음으로는 늘 쓰고 있다는 말 속에

내가 이미 세 들어 살기 시작했다는 걸.

 

출처: 시집[사라진 손바닥]

 

 

 

 

 

마라도

 

: 강문신 

 

차오른 생각에는 내 누이가 있습니다

신기슭 갯마을이거나 수평선 끝 닿은 데거나

누이는 빛바랜 바다로 그 어디나 있습니다

우리 한 식구가 불빛으로 모여살땐

빈소라 껍질에도 만선꿈은 실렸습니다

수평선 그 한 굽이에 마음뿐인 산과 비디

마라도 선착장은 받아든 저녁상입니다

허술한 초가지붕 딧니 물린 호박꽃도

그 여름 놓친 반딧불 벌빛 따라 내립니다

남낵 섬 하늘의 인연도 끝 간 자리

바나는 어디에도 가는 길만 열려있고

서낭당 소망은 하나 둥근 시발 달픕니다

물마루만 바라봐도 청보리밭 키 큰 누이

한점 바닷새가 저녁 놀을 물고 와서

윤회의 섬바위 끝에 하얀 집을 짓습니다

 

출처: 석파신선암철쭉제 운영위원회 발간집

 

 


 

한라산은 서서

 

: 신석정 

태초였다. 너무 어두웠다.

그 무서운 혼돈 속에 한라산은 서서

뜨거운 가슴을 불을 뿜으며 몸부림쳤다.

<어둡다!> <어둡다!> <어둡다!>

한라산의 목멘소리.....

그러는 동안 여러 천년이 흘러갔다.

하늘이 처음 열리던 그 어느날 아침

머언 구름 밖에 아스라이 솟아오른

지리산을 금강산을 백두산을 한라산은 서서 역력히 보았다.

외롭지 않아서 한라산은 즐거웠다.

그동안 또 여러 천년이 흘렀다.

뜨거웠던 가슴을 백록담 차운물로 달랜 다음

숱한 초목과 금수를 거느리고

항상 바다 건너 머언 조국을 간절히 보살폈다.

사철푸른

굴거리나무로 북가시나무로 빗죽나무로 꽝꽝나무로 비자나무로

한때 상처입었던 아랫도릴 가리고

철철이 피어나는

만병초꽃으로 동백꽃으로 협죽도 꽃으로 뻐꾹채꽃으로 구름송이 꽃으로 시로미로

가슴을 단장하고 머리를 단장하고 한라산은 서서

착하게 살아왔다.

그뒤 또 여러 천년이 이어 흐르고 있다.

드세게 몰아치는 계절풍 따라 꽃가루 눈보라 철새도 오가는데,

한라산은 서서 태고히 서서

금강산을 부른다 백두산을 부른다. 메아리도 없다.

지금 나는 우리 <>이가 비행기에 실려 보내 온 밀감을 지근거리며 문득 운무와 더불어 외로이 사는 한라산을 <>이보다 외로운 망아지들이 풀을 뜯는 한라산 백록담을 생각하고 있다.

 

출처_신석정 전집I/국악자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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