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랜컬쳐 낭송시 모음집 1

포랜컬쳐 낭송시 모음집 1

소하 0 69

 49eb97f2ff07bb7440d6645b1f17822d_1694310358_08.jpg 

                                                                                정옥이 사진작


*행렬 등 미교정 상태로 곧 교정 들어감.


여행

 

: 박경리 낭송: 김용자 예심: 송빈

 

나는 거의 여행을 하지 않았다. .

피치 못할 일로 외출해야 할 때도

그 전날부터 어수선하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어릴 적에는 나다니기를 싫어한 나를

구멍지기라 하며 어머니는 꾸중했다.

바깥 세상이 두려웠는지

낯설어서 그랬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나도 남 못지 않은 나그네였다.

내 방식대로 진종일 대부분의 시간

혼자서 여행을 했다.

꿈속에서도 여행을 했고

서산을 바라보면서도 여행을 했고

나무의 가지치기를 하면서도,

서억서억 톱이 움직이며

나무의 살갗이 찢기는 것을,

그럴 때도 여행을 했고

밭을 맬 때도

설거지를 할 때도 여행을 했다.

 

기차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혹은 배를 타고

그런 여행은 아니었지만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끼는

그런 여행은 아니었지만

보다 은밀하게 내면으로 내면으로

촘촘하고 섬세했으며

다양하고 풍성했다.

 

행선지도 있었고 귀착지도 있었다

바이칼 호수도 있었으며

밤 하늘의 별이 크다는 사하라 사막

작가이기도 했던 어떤 여자가

사막을 건너면서 신의 계시를 받아

메테르니히와 러시아 황제 사이를 오가며

신성동맹을 주선했다는 사연이 있는

그 별이 큰 사막의 밤하늘

 

히말라야의 짐진 노새와 야크의 슬픈 풍경

마음의 여행이든 현실적인 여행이든

사라졌다간 되돌아오기도 하는

기억의 눈보라

안개이며 구름이며 몽환이긴 매일반

다만 내 글 모두가

정처 없던 그 여행기

여행의 기록일 것이다

 

 

박경리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마로니에북스. 2008. 6. 2

 

 

아버지의 눈물

 

: 이채 

 

남자로 태어나 한평생 멋지게 살고 싶었다

옳은 것은 옳다고 말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말하며

떳떳하게 정의롭게 사나이답게 보란 듯이 살고 싶었다

 

남자보다 강한 것이 아버지라 했던가

나 하나만을 의지하며 살아온 아내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을 위해

나쁜 것을 나쁘다고 말하지 못하고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이 세상살이더라

 

오늘이 어제와 같을지라도

내일은 오늘보다 나으리란 희망으로

하루를 걸어온 길 끝에서

피곤한 밤손님을 비추는 달빛 아래

힘없이 걷는 발걸음 소리

쓴 소주잔을 기울이면

소주보다 더 쓴 것이 인생살이더라

 

변변한 옷 한 벌 없어도

번듯한 집 한 채 없어도

내 몸 같은 아내와 금쪽같은 자식을 위해

이 한 몸 던질 각오로 살아온 세월

애당초 사치스러운 자존심을 버린 지 오래 구나

 

하늘을 보면 생각이 많고

땅을 보면 마음이 복잡한 것은

누가 건네준 짐도 아니건만

 

바위보다 무거운

무겁다 한들 내려놓을 수도 없는

힘들다 한들 마다할 수도 없는 짐을 진 까닭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울어도 소리가 없고

소리가 없으니 목이 멜 수밖에

 

용기를 잃은 것도 열정이 사라진 것도 아니건만

쉬운 일 보다 어려운 일이 더 많아

살아가는 일은 버겁고 무엇 하나 만만치 않아도

책임이라는 말로 인내를 배우고

도리라는 말로 노릇을 다할 뿐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울어도 눈물이 없고

눈물이 없으니 가슴으로 울 수밖에

 

아버지가 되어본 사람은 안다

아버지는 고달프고 고독한 사람이라는 것을

아버지는 가정을 지키는 수호신이기에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약해서도 울어서도 안 된다는 것을

그래서 아버지는 혼자서 운다

아무도 몰래 혼자서 운다

하늘만 알고

아버지만 아는...

 

출처 : 이채 제 7시집 (마음이 아름다우니 세상이 아름다워라)

20141111일 도서출판 행복에너지


 




 

못위이 잠

 

: 나희덕 

 

저 지붕 아래 제비집 너무도 작아

갓 태어난 새끼들만으로 가득차고

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누가 박아 놓았을까요, 못 하나

그 못이 아니었다면

아비는 어디서 밤을 지냈을까요

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

나는 눈이 뜨겁도록 올려다 봅니다

종암동 버스 정류장, 흙바람은 불어오고

한 사내가 아이 셋을 데리고 마중 나온 모습

수많은 버스를 보내고 나서야

피곤에 지친 한 여자가 내리고,그 창백함 때문에

반쪽 난 달빛은 또 얼마나 창백했던가요

아이들은 달려가 엄마의 옷자락을 잡고

제자리에 선 채 달빛을 좀 더 바라보던

사내의, 그 마음을 오늘 밤은 알 것도 같습니다

실업의 호주머니에서 만져지던

때 묻은 호두알은 쉽게 깨어지지 않고

그럴듯한 집 한 채 짓는 대신

못 하나 위에서 견디는 것으로 살아온 아비,

거리에선 아직도 흑바람이 몰려오나 봐요

돌아오는 길 희미한 달빛은 그런대로

식구들의 손잡은 그림자를 만들어 주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골목이 너무 좁았고

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자

그 꾸벅거림을 기억나게 하는

못 하나, 그 위의 잠

 




 

풀밭에 누워서

: 심훈 

 

가을날 풀발에 누워서

우러러보는 조선의 하늘은

어쩌면 저다지도 맑고 푸르고 높을까요?

닦아 논 거울인들 저보다 더 깨끗하오리까.

 

바라면 바라다볼수록

천리만리 생각이 아득하여

구름장을 타고 같이 떠도는 내 마음은

애달픈 심란스럽기 비길 데 없소이다.

오늘도 만주벌에서는 몇천 명이나 우리 동포가

놈들에게 쫓겨나 모진 악형까지 당하고

몇십 명씩 묶여서 총을 맞고 거꾸러졌다는 소식!

 

거짓말이외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거짓말 같사외다.

고국의 하늘은 저다지도 맑고 푸르고 무심하거늘

같은 하늘 밑에서 그런 비극이 있었을 것 같지는 않소이다.

 

안땅에서 고생하는 사람들은 상팔자지요.

철창 속에서라도 이 맑은 공기를 호흡하고

이 명랑한 햇발을 쬐어 볼 수나 있지 않습니까?

 

논두렁에 버티고 선 허재비처림

찢어진 옷 걸치고 남의 농사에 손톱 발톱 닳리다가

풍년 든 벌판에서 총을 맞고 그 흙에 피를 흘리다니..

 

미쳐날 듯이 심란한 마음 걷잡을 길 없어서

다시금 우러르니 높고 맑고 새파란 가을 하늘이외다

분한 생각 내쁨으면 저 하늘이 새빨갛게 물이 들 듯하외다.

 

출처: 그날이 오면 / 한성도서주식회사. 1949

 

 




 

전라도 가시내

 

 

 

: 이용악 

 

 

알룩조개에 입 맞추며 자랐나

눈이 바다처럼 푸를 뿐더러 까무스레한 네 얼굴

가시내야

나는 발을 얼구며

무쇠다리를 건너온 함경도 사내

 

바람소리도 호개도 인전 무섭지 않다어두운 등불 밑 안개처럼

자욱한 시름을 달게 마시련다만

어디서 흉참한 기별이 뛰어들 것만 같애

두터운 벽도 이웃도 못미더운 북간도 술막

 

온갖 방자의 말을 품고 왔다

눈포래를 뚫고 왔다

가시내야

너의 가슴 그늘진 숲속을 기어간 오솔길을 나는 헤매이자

술을 부어 남실남실 술을 따르어

가난한 이야기에 고히 잠거 다오

 

네 두만강을 건너왔다는 석 달 전이면

단풍이 물들어 천 리 천 리 또 천 리 산마다 불탔을 겐데

그래도 외로워서 슬퍼서 치마폭으로 얼굴을 가렸더냐

두 낮 두 밤을 두루미처럼 울어 울어

불술기 구름 속을 달리는 양 유리창이 흐리더냐

 

차알삭 부서지는 파도 소리에 취한 듯

때로 싸늘한 웃음이 소리 없이 새기는 보조개

가시내야

울 듯 울 듯 울지 않는 전라도 가시내야

두어 마디 너의 사투리로 때 아닌 봄을 불러 줄게

손때 수줍은 분홍 댕기 휘 휘 날리며

잠깐 너의 나라로 돌아가거라

 

이윽고 얼음길이 밝으면

나는 눈포래 휘감아 치는 벌판에 우줄우줄 나설 게다

 

노래도 없이 사라질 게다

 

자욱도 없이 사라질 게다

 

출처: <시학>(1939)

 

 




마법의새

 

: 박두진 

 

 

아직도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다

너는 하늘에서 내려 온

몇 번만 날개 치면 산골짝의 꽃

몇 번만 날개 치면 먼 나라 공주로

 

물에서 올라올 땐 푸르디푸른 물의 새

바람에서 빚어질 땐 희디하얀 바람의 새

불에서 일어날 땐 붉디붉은 불의 새로

아침에서 밤 밤에서 꿈에까지

내 영혼의 안과 밖 가슴속 갈피갈피를

포릉 대는 새여

 

어느 때는 여왕으로 절대자로 군림하고

어느 때는 품에 안겨 소녀로 되어 흐느끼는

돌아설 땐 찬바람

빙벽 속에 화석하며 끼들끼들 운다

 

너는 날카로운 부리로

내 심장의 뜨거움을 찍어다가 벌판에 꽃뿌리고

내가 싫어하는 짐승 싫어하는 뱀들의

그것의 코빼기를 발톱으로 덮쳐

뚝뚝 듣는 피를 물고 되돌아올 때도 있다

 

너는

홀로 쫓겨 숲에 우는 어린왕자의 말이다가

밤마다 달빛 섬에 홀로 우는 학이다가

오색 훨훨 무지개 속 구름 속의 천사이다가

돌로 치는 군중 속의 피흐르는 창녀이다가

한번 맡으면 쓰러지는 독한 꽃의 향기이다가

새여

 

느닷없이 얼키설키 영혼을 와서 어지럽혀

나도 너를 알 수 없고 너도 나를 알 수 없게

눈으로 서로 보면 눈이

넋으로 서로 보면 넋이

타면서 서로 아파 깊게 깊게 앓는

 

서로 오래 영혼 끼리 꽃으로 서서 우는

서로 찾아 하늘 날며 종일을 울어 예는

어쩔까 아 징징대며 젖어오는 울음

아직도 너를 나는 사랑하고 있다.

 

박두진 시 전집 발췌


 






 

행복

 

: 유치환 낭송: 백상기 예심: 김득기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 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이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 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서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 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붓 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망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 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출처: 중앙출판공사

 

 

 


 

 


 


 

남한산성

 

: 류병구 

 

섣달 한겨울이 소리내어 운다.

정적을 가르는 산 울음 소리

믿을 데라곤 오직 하늘뿐인 고독한 성에서

차가운 눈비에 어의를 적시며

치욕을 삼키고 피눈물 쏟아낸

왕의 통곡이었다.

"내 한 몸이야 죽어도 애석치 않지만

만백성이 하늘에 무슨 죄가 있습니까

조금이라도 날이 개게 하여 우리 백성을

살려주소서..."

이제는 아주 옛날이 되어버린

우익문의 처절한 기억

1637130일 그날,

왕은 이 문을 통해 산성을 나가

송파 삼전도로 향했다.

신하들이 서문 안에 서서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

먹구름이 흘러간 삼백여든 몇 해

복받치는 비분으로 울컥일 때마다

찬 바닥에 엎드렸던 역사가

불현듯이 불끈 일어서는 남한산성

그 통한의 진문(陳門)에는

울긋불긋 등산객들로 미어진다.

시간이 지나고 또 지나는 동안

아픈 유적 틈새로 봄이 가고, 가을이 온다.

그리고 다시 섣달 한겨울이 온다.

 

본문출처: 다할시선5 류병구 <낮은 음역의가락>(2019)다할미디어

 

 

 

 

 

조국이여 당신은 진정 고아일다

 

: 유치환 낭송:

 

나의 눈을 뽑아 북악의 상성 위에 높이 걸라

망국의 이리들이여!

내 반드시 너희의 그 불의의 끝장을 보리라

 

쓰라린 쓰라린 조국의 오랜 환난의 밤이 밝기도 전에

너희 다투어 그를 헐벗기어 아우성치며

일찍이 원수 앞에 떳떳이 쓰지 못한 환도이어든

한낱 사조를 신봉하여

골육의 상쟁을 선동하여 불 놓기를 서슴지 않고

보잘 것 없는 제 주장을 고집하기에

감히 나라의 망함은 두려하지 않나니

매국이 의를 일컫고

사욕의 견구는 저자를 이루어

오직 소리소리 패악하는 자만이 도도히 승세하거늘

 

나의 눈을 뽑아 북악의 산성 위에 높이 걸라

일찌기 악한 것이 끝내 영화하고

불의가 의를 낳음은 보지 못했느니

오늘에 이르러 너희의 행패가

드디어 또 한 번 원수를 이 땅에 이끌어

그 무도한 발길에 무찔러 조국의 산하가 마르고

사직의 주추에 잡초가 더욱 더 우거지고

망국의 성터 위에 별들이 모여 떠는

수많은 겨레의 생령이 죽어가는 일이 다시없기를

아 아 뉘가 어찌 기약하료

내 반드시 너희의 이 불의의 끝장을 보리라

 

.....그러나 조국이여

양춘이라 봄이 오면

아지랑이 날으는 이 강산에

진달래 철 따라 피어 널림이

아 아 서럽지 서럽지 아니한가

 

출처: 유치환시집 울릉도 출판사 행문사(1948)시인 의 작품 중




석문

 

: 조지훈 낭송

 

 

당신의 손끝만 스쳐도 여기 소리 없이 열릴 돌문이 있습니다.

뭇사람이 조바심치나 굳이 닫힌 이 돌문 안에는 석벽 난간(

) 열두 통계 위에 이제 검푸른 이끼가 앉았습니다.

 

당신이 오시는 날까지는, 길이 꺼지지 않을 촛불 한 자루도 간직

하였습니다. 이는 당신의 그리운 얼굴이 이 희미한 불 앞에 어리

울 때까지는 천 년이 지나도 눈 감지 않을 저의 슬픈 영혼

의 모습입니다.

 

길슘한 속눈썹에 항시 어리우는 이 두어 방울 이슬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남긴 푸?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