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영란 시인의 안부, 가을인가 봅니다. 1

공영란 시인의 안부, 가을인가 봅니다. 1

소하 0 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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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영란 시인


아직은 가을인 비가 내립니다 


                              공영란


아직은 가을인 비가 어둠이 짙게 내려

나를 가둔 쓸쓸한 추억 뒹구는 거리에

마지막 잎이 거친 숨 토하듯 내립니다


한마디 말이라도 할라치면 금방이라도

얼음이 될 것 같은 추억은 감옥이지만

그가 가둔 감옥 문을 아직 열지 못하고


가을이 가둔 거리에 추억 우산 펼치며

첫눈이 올 때까지 머물고 싶은 마음에

아주 가까운 현실, 겨울을 외면합니다


가을과 겨울의 기준은 온도가 아니라

추억임을 외면한 그는 겨울비 움켜쥔

내 손 모른 척 문 여는 소리 요란합니다


가을 감옥에 겨울, 겨울비 요란합니다

아직 첫눈 내리려면 한참 남은 어둠 속

가을비 우산 펼치고 서성이는 내 맘에





꽁꽁이와 훨훨이 


                   공영란


당신, 꽁꽁이가 되셔서 날 놀리시는 거죠

세찬 빗줄기로 그 곱던 단풍 다 쓸어가고

무서리 찬바람 휘몰아치더니 부족했나요

오늘 텅 빈 들판까지 꽁꽁 얼려버렸더군요


다 쓸어가고 온 세상 꽁꽁 얼어붙게 해놓고

마음마저 꽁꽁 동여매어 두었다고요. 그럼

저기 훨훨 날아가는 영혼은 누구 것인가요

당신, 아직도 모르는 바보라서 멀었습니다





희망은 삶의 무성한 바람입니다 


                                 공영란


삶은 여린 나뭇가지 하나 꺾어보는 것일까요

그들이 진실보다 거짓에 더 열광하는 것은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원할 것 같았던 권세가 흔들리듯

악함과 거짓의 성은 누가 흔들지 않아도

밑돌 빠진 석가래 무너짐 같기에

우리는 살아 있는 희망을 떠올립니다


그래도 희망은 죽지 않습니다

삶에 힘의 근원인 사랑 때문입니다

진실은 조롱받고 질식당하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여태 그랬듯이 이겨냅니다

당신과 나의 변함없는 혼이기 때문에

오늘도 살아 있는 진실 희망을 품습니다

봄이 되면 메마른 가지에 물오르고 꽃이 피듯

우리의 희망은 강하여 바람이 무성합니다





수마가 쓸고 간 삶  


                공영란


발을 들여놓는 게 아니었다

한 번 내디딘 걸음이 수렁에 빠진 듯

허우적거리며 더 깊어져만 가니 이젠

벗어나는 것도 어려워 보인다

삶이 이렇다고 누가 한마디 해 줬었더라면

그의 삶이 과연 달라졌을까


지난 뒤 겨우 깨닫는 것에도 감사하라는

그들의 말이 그에겐 오히려 아픔이었다

까마득히 멀어 보이는 외로운 길

언제 그 늪에서 헤어나올 수 있을까

언제나 누구도 관심 없는 뒷모습에

쓸쓸한 바람이 안타까움을 더한다


빠르게 흐르는 물살이 하늘처럼

푸르렀던 나무를 머리만 남기고 무심하다

스쳐온 삶이 물속에 잠긴 저 나무 같다고

세상만큼 징한 것이 또 있을까 중얼거리며

돌아서는 그의 늘어진 어깨 위로

가을 노을이 서러운 붉은 눈물 흘린다




할미꽃 


   공영란


비탈 양지바른 암석선상지에 내려앉은 봄

아지랑이 스멀스멀 수다스러운 입김에

꼬부라진 허리 쭉 펴고 할미꽃이 활짝 웃는다


그리움만 일렁이고 있는 산기슭 양지녘에서

폭염, 태풍, 휘몰아치는 추위도 견디고 있으면

새날이 온단 걸 수십 년 동안 체득한 그녀가


견디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없다는 걸 알기에

눈물 흔적도 남지 않을 이별 가슴에 안고서

꼬부라진 허리 쭉 펴고 태연하게 활짝 웃는다




그녀의 쪽빛 닮은 웃음 


                  공영란


유리알처럼 맑은 그녀입니다

사슴 같은 눈망울이 가끔은

마른 대지를 적시고 남을 사연 풀고

가문 날 소낙비처럼 흘러내려도 좋으련만

그녀는 그런 법이 없습니다


말없이 시냇물 삼키는 사슴처럼

사랑만 품고 있는지 언제나 침묵하더니

긴 터널을 지났을까요 오늘 그녀가

쪽빛 하늘보다 더 푸르게 웃는 모습이

함박꽂 속에 숨어 있던 벌 나비 같습니다





마음 뜰에 핀 매화 


                   공영란


그리운 사람의 손톱 몰래 품고 있진 않아도

봉숭아 물 곱게 물들인 손톱 길게 길러가는

애달픈 기다림은 지치지 않는 빨간 우체통


거꾸로 솟은 고드름 얼음계곡 기침하면

이슬보다 곱게 빛나던 설화에 연둣빛 돋아

살랑살랑 봄노래 가냘픈 얼후 애처롭구나


당신과 걷던 산책길 매화 한가지 꺾어다가

목마른 내 영혼의 작은 뜰에 옮겨 놓으니

활짝 피어 내 맘에 따뜻한 매화향 가득하다




요 위에 새긴 마음


                    공영란


그대 붉은 심장 떨구고 가던 날

흔들림 없이 늘어지던 그림자가

굳어 버린 목각인형 마음 같아서

설움이 내려앉은 어스름이더라


꽃보다 곱던 예쁜 사랑 흩어지니

두 눈에 샘물처럼 고였던 말들이

당신 없는 세상 온통 결핍이라고

자고 일어나니 요 위에 새겨있다





엇갈린 기도 


        공영란


지나온 세월 후회가 많아 무심코 나선 걸음이

또 당신 집에 와버렸는데 당신은 여전히 없네요

뽀얀 담배 연기처럼 안개비가 내려앉은 거리를

그때처럼 길을 잃고 헤매다 주저앉아 울었어요

그때 당신 내 집에 와 있었다지요 엇갈렸네요


안개 속에서 헤매며 걷다가 한순간 뭉클했는데

아마 그때가 당신과 내가 마주칠 때였나 봅니다

내가 미처 못 보았어도 당신은 알고 있었겠지요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내려 그때 나는 말이에요

당신이 왜 내 손을 잡지 않았는지 정말 몰랐어요


그러나 세상이 따뜻한 빛이라는 걸 이제 알아요

오늘도 엇갈림 속에서 두 손 모으고 눈 감았지만

그 속에도 여전히 당신 웃으며 함께 하시겠지요

이제 내 속엔 오색 희망이 기지개 활짝 폅니다

그때 당신도 날 찾아왔다는 것을 알았으니까요





기다리던 편지


                공영란


바람이 고운 단풍에 계절 안부를 갖고 왔네요

눈을 갖고 올 줄 알았더니 빗님이랑 함께 내요

아마도 잘못 온 편지가 아닐까 하여 뜯지 않고

그냥 돌려보냈구먼 오늘 아침 창문 두드리는

세찬 소리에 밖을 보니 그 편지가 다시 왔네요

분명 내가 기다린 것이 겨울 아닌 봄이란 걸

바람 그도 눈치챈 모양입니다


창문 열어 가슴 활짝 펴고 찬비를 맞이합니다

간절히 생각하면 웃음꽃이 심장을 두드려

마음속에 봄이 먼저 온다고 당신이 그랬지요

내 속에 당신 봄꽃보다 더 환하게 웃고 있으니

그렇게 기다리던 편지 당신이 봄이네요




안부 


    공영란


아버지 그날처럼 비가 내립니다

보내 주신 편지 잘 받았습니다


봉투 안에 넣어 두셨다던 아쉬움

언제나 자식 먼저였던 그 섬세함과

인자하신 마음 따뜻한 사랑의 숨결은

굴곡 심한 세월의 산을 넘어오다 만난

허기진 찬바람이 앗아갔나 봅니다


받은 건 오늘도 빈 봉투입니다

심장 데우는 그리움 비가 되어 내립니다


아버지 천국에서 평안하시고 영생하세요

우리는 영원히 사랑합니다





그리움의 강물 유행가로 흐른다 


                                공영란


지친 몸 바람에 씻고 부처같이 앉아도

담장마다 늘어진 덩굴장미 유혹 위에

발길 멈춘 나비 되어 또 그리움 쫓는다


구름 같은 마음이 꽃향기 모아 놓고선

낡은 유행가 코끝에 앉아 흥얼거리니

한 가닥 바람이 제 것인 양 날름 앗아간다


그때처럼 돌아선 외로운 그림자만이

그들 사이 들리는 곳까지만 외쳐댄다

사랑아 너무 멀리까지는 가지 말아라


그러나 부시게 고운 햇살만 세월처럼

그림자 보듬어 안고서 길게 늘어지니

허공도 따라 강물 되어 그리움 씻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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