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브릿지 낭송詩 산책 3 * 곽재우 장군의 일기/박선해
포랜컬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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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0 17:54
장독대에 남은 이름/박선해
- 곽재우 장군 생가 장독대에서
새벽안개가 들판을 덮을 때
생가의 마당은 먼저 어두워진다
검붉은 장독대들이 밤의 끝을 붙잡고
말없이 숨을 고른다
독마다 뚜껑이 있고 뚜껑 아래에는
한 계절씩 접혀 들어간 시간들이 있다
햇볕과 비, 돌아오지 않은 발걸음과
기다리다 식은 손의 온기까지
그 안에서 장은 익고
시간은 더디게 풀린다
옛날, 저 마당 끝을 밟고 한 사내가 나섰다
강물 같은 눈으로
말하지 못한 상처들을 오래 바라보던 사람
칼을 들고도 끝내 휘두르지 않는 쪽을
몸으로 선택한 사람
그가 남긴 것은
승전의 함성보다
돌아온 집의 숨결이었다
비워진 자리에서 독들은 다시 제자리를 찾고
마당은 또 다른 기다림을 받아들였다
해마다 장이 익을 즈음이면
바람이 먼저 와 뚜껑을 스친다
손보다 빠른 바람이
말 대신 향을 열어젖히면
사람들은 잊었다고 믿었던 이름을
비로소 떠올린다
그 이름은 외치지 않아도
흙 속에서 장 속에서
천천히 되살아난다
발효란 지워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낮추는 일이라는 듯
이 마당의 시간은 늘 나직하다
마른 장독대 사이로 삶과 죽음,
투쟁과 평화가 구분 없이 배어 나온다
서로 다른 색이었으나 오래 묵어
같은 빛이 되었다
낮에는 아이들이 지나가고
밤에는 달빛이 머문다
아무도 칼을 들지 않지만
모두가 무언의 무게를 건너간다
누군가의 선택이 이토록 오래 익어
오늘의 숨이 되었음을
독들은 말하지 않는다
다만 지나는 발걸음마다
묵직한 체온을 조용히 남긴다
아직 열리지 않은 독들 속에
다음 시대의 시간이
천천히 자리를 잡고 있다
곽재우 장군의 일기/박선해
나는 과거로 간다 연대가 아니라
젖은 종이의 냄새 속으로
장군의 일기는 승전이 아니라
밤마다 지워진 이름들로 시작된다
칼보다 먼저 닳은 것은
사람을 믿으려는 마음이었다
저층의 페이지에는 진흙이 묻어 있다
군화보다 먼저 빠진 발,
굶주린 병사들의 숨이 글자 사이에서 식는다
나는 그의 문장 속으로
심장을 들이 민다
두려움이 기록될 때
비로소 용기가 생긴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중층으로 올라가면
분노는 절제된 문장이 된다
싸워야 할 적보다
지켜야 할 백성의 수가 늘 먼저 적혀 있다
그의 붓은 명령을 내리지 않는다
다만 무너지지 않기 위해
사람이 어디까지 낮아질 수 있는지를
묻고 또 묻는다
고층의 기록에는 승리가 없다
남아 있는 것은
칼을 내려놓은 손의 떨림,
끝까지 돌아오지 않은 시간들
나는 그 정신을 현대로 옮긴다
비겁함이 합리로 위장한 시대,
침묵이 중립으로 팔리는 거리에서
그의 문장은 기둥이 된다
미래로 갈수록
싸움은 보이지 않게 변한다
그러나 지켜야 할 것은
여전히 사람이다
나는 다시 일기를 덮는다
역사는 지나갔지만
심장은 아직 그의 날짜를 살고 있다
곽재우 장군 생가 마루에 앉아/박선해
마루는 앉는 법만 남아 있었다
나는 신발을 벗고 나무의 숨결 위에
몸을 낮췄다
사람 하나 빠져나간 자리에
햇빛이 먼저 들어와
널찍하게 앉아 있었다
마루 끝에서 은행잎 몇 장이
발뒤꿈치처럼 굴러왔다
노랗게 마른 것들이
말 대신 시간을 흔들었다
이 집은 주인이 없는 게 아니라
아직 떠나지 않은 것이 많았다
기둥의 결, 문지방의 높이,
한 번도 급히 닫히지 않았을 마루의 간격
마당을 건너온 바람이 은행나무 아래서 한 번 멈췄다
그늘이 깊은 것은 뿌리가 오래 남아 있어서였다
누군가는
이곳에서 칼을 들었겠지만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내려놓은 자국뿐이다
결심이 지나간 자리의 조용함
나는 마루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버티는 법, 물러서지 않는 법이
행동보다 먼저 몸에 남는다는 것을
이 마루는 사람을 키우지 않고
시간을 키웠고 그 시간이
지금의 나를 잠시 앉게 했다
나는 다시 일어나겠지만
이 마루는 오래 남아 앉는 법을
다음 몸에게 건네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