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브릿지 낭송詩 산책 1 * 덩굴위의 양극/박선해
포랜컬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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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1 19:33
[제1편]
덩굴 위의 양극
박선해
나비는 햇살을 입고 오늘의 가벼움을 연습한다
공중에서 하루를 접어 꽃의 이마에 살짝 얹는다
뱀은 땅의 체온을 두르고
어제의 무게를 끌고 간다
모래는 그의 비밀을 삼키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을 한다
덩굴은 두 쪽의 세계를 잇는 가느다란 다리,
위로는 향기를 건네고 아래로는 숨을 내려 보낸다
꽃은 웃는 법을 배운 적 없는데
늘 웃는 얼굴로 서 있고,
독은 울지 않는 법을 배운 적 없는데
밤마다 혼자 운다
나비의 날개가 바람을 쪼개면 하루가 한 겹 더 밝아지고,
뱀의 혀가 공기를 더듬으면 어둠이 한 칸 더 깊어진다
잎맥마다 시간의 혈관이 뛰고
가시는 내일의 그림자를 세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위와 아래를 동시에 견디는 일
덩굴 끝에서
빛과 흙이 서로의 이름을 바꿔 부른다
그 사이,
한 생이 조용히 흔들린다
[제2편]
작천정, 시간이 흐르는 자리
박선해
돌은 오래된 등을 내어주고
물은 그 위를 건너며 하루를 닮아 흐른다
수백 번 계절이 바뀌어도
이 자리는 제자리를 지켜 왔다
사람이 떠나도 돌은 떠나지 않는다
발자국이 사라진 자리마다
시간이 먼저 앉아 숨을 고른다
정자는 바람을 앉혀 두고
세월의 장을 한 장씩 넘긴다
전쟁도 지나갔고 기근도 지나갔고
이름 없이 살다 간 삶들도
이 돌 위에 잠시 앉았다 떠났다
돌은 묻지 않는다 누가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다만 등을 내어주고 무게를 받아낸다
무너질 듯한 날에도 말없이 버티는 법을
먼저 보여 준다
물은 매번 새로 흐르지만
돌은 같은 자리에서
흐름을 견디는 법을 안다
급하게 살수록 사람은 먼저 닳고
천천히 버틸수록 돌은 더 깊어진다
오래 남는 것은
앞서간 발자국이 아니라
끝내 자리를 지킨 마음이라는 것
나는 그 앞에 잠시 서서
살아온 시간을 내려놓고
버티는 법과 기다리는 법과
다시 일어나는 법을 말없이 배운다
돌은 오늘도 아무 말 없이
사람의 삶을 받아내며
역사의 등을 조용히 지키고 있다
[제3편]
능가사의 종소리
1
천삼백 해 전 옛날, 먼 바다 건너와서
능가경 품어 안고 불빛 세운 한 스님
청겹산 깊은 품 속에 절 하나 머물렀네
2
매화 향기 봄을 열고 솔바람 여름 식혀
가을 달빛 부도탑 겨울 서리 목탑 감싸
사계절 고요한 풍경 속 참빛은 숨쉬도다
3
밤 깊어 종 울리면 맑은 소리 번져가고
골짜기 메운 울림 시름을 넘어 간다
사람의 마음 고요히 산 너머 흘러간다
4
능가경 글자마다 경판 속에 숨쉬듯이
오늘도 누군가는 이곳에서 길을 찾아
속세의 마음 밝히며 참뜻을 배우도다
5
이끼 낀 돌계단 위 새벽 안개 내려앉고
발걸음마다 묵은 시간 한 겹씩 풀리네
산새의 짧은 울음이 빈 하늘 두드리며
6
차 한 잔 김 오르는 작은 창가 아래엔
흔들리는 촛불 음영 사바세계 건너가
말 대신 남은 침묵이 길게 앉아 드리워
7
해 저녁 능가사 지붕 위로 별 모여
하루의 발자국들 하나씩 씻어 내고
종소리 여운을 따라 삶의 물결 흐른다.
[제4편]
겨울 딸기
박선해
인도 가장자리, 눈이 닿지 못한 틈에서
붉은 입술 하나가 길을 향해 놓여 있다
비닐의 얇은 어깨에 먼지와 햇살이 겹쳐 앉아
시간이 주름을 남긴다
광주리 속, 열매들 사이로
종이 돈의 모서리가 살짝 드러난다
여정은 접힌 흔적으로 온다
사람들의 시선이 먼저 지나가고,
딸기는 붉은 표정으로
자리를 붙든다
길의 끝을 묻는 바람이
찬 공기 속을 돌아오고,
대답 대신 향기만 낮게 번진다
오늘, 누군가의 식탁에 이름 대신
맛으로 불리기 위해
몸을 밝히고 서 있다
겨울 한복판에서 이토록
드러나 있는 것은 딸기보다
지나가는 눈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