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권의 의령 이야기 8, 설뫼 마을 -백산 안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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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권의 의령 이야기 8, 설뫼 마을 -백산 안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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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권 수필가



일제 항일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민족 지도자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삼백(三白)이다. 백범(白凡) 김구 선생과 백야(白冶)김좌진 장군, 그리 고 백산 (白山)안희제 선생이다. 김구 선생과 김좌진 장군에 대해서는 역 사적 조명과 기념사업이 활발하지만 그에 비해 안희제 선생에 대한 조명 과 평가는 다소 미흡한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오늘은 의령 출신 안희제 선생의 일생을 따라가 보기로 한다. 백산(白山)은 1885년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立山里)에서 태어났다. 입산리의 옛 지명은 설뫼 마을이다. 설 입(立), 뫼 산(山)의 입산(立山) 은 설뫼 마을의 훈차자(訓借字) 지명인 셈이다. 큰 도랑을 사이에 두 고 별미마을(경산리)과 마주 보고 있는데 유곡천이 경산, 구산, 난동 등을 사이에 두고 서남쪽에서 동북으로 역수(逆水)로 흐른다. 그래서 풍수지리에서는 큰 충신이 아니면 역적이 날 것이라고 했는데 과연 48_김정권의 의령이야기 1부 김정권의 의령이야기_49 의령 제8경 백산안희제선생 생가 50_김정권의 의령이야기 그 말은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특히 일제 강점기에는 백산(白山)을 비롯한 수많은 설뫼 마을 출신 독립운동가가 있었다. 백산(白山)은 탐진안씨(耽津安氏)다. 탐진안씨의 설뫼 마을 입향조 (入鄕祖)는 안기종이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 장군과 함께 복병 장으로서 유곡에 거주하면서 낙동강을 방어하고 이후 안골에서 설뫼 마을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설뫼 마을이 탐진안씨의 밀집된 동촌 부 락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설산재 안여석(1717~1787) 무렵부터 보 이는데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동족 마을 조사기록을 보면 1930년 대 설뫼 마을은 탐진안씨 가구 80여 호나 있었던 큰 마을이었다. 일제강점기 설뫼 마을 출신 탐진안씨의 항일운동은 일일이 열거하 기 어려울 정도다. 대표적인 인물만 보더라도 건국훈장을 추서받은 수파 안효제, 송은 안창제 형제가 있고 조선어학회 회원으로 초대 문 교부 장관을 지낸 한뫼 안호상, 신간회 의령지회 창립을 주도하고 제 헌국회의원을 지낸 근산 안준상 등이 있다. 이외에도 일범 안일상, 고 헌 안여상, 백산(白山)의 동생인 아산 안국제 등 설뫼 마을은 수많은 애국지사를 배출했으니 설뫼가 없었다면 대한 독립도 어려웠을 것이 라는 말이 과장이 아니라 할 만하다. 백산(白山)에 대한 기록이 다른 애국지사에 비해 빈약하게 남아 있 는 것은 그의 항일 활동에 비추어 보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임 1부 김정권의 의령이야기_51 시정부 운영자금의 60%를 백산(白山) 혼자서 조달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백산(白山)은 독립자금 조달은 물론이고 연락책의 역할까지 직접 감당했기 때문에 항상 일본 경찰의 감시 대상 1호였다. 그러나 그는 더더욱 철저하고 비밀스럽게 활동했기 때문에 한 번도 꼬리를 잡힌 적이 없었고 이것이 역으로 그의 기록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은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백산의 나이 21세가 되던 해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향리 에서 이 소식을 듣자 그는 책을 덮고 붓을 꺾었다. 나라가 송두리째 망하는 판국에 허약한 선비가 무엇에 쓰일 것인가 하고 고향을 떠나 상경길에 올랐으니 이때부터 백산의 외롭고 험난한 항일 역정이 시작 되었다. 단신으로 서울에 올라온 백산은 나라를 구하려면 신학문을 부림면 입산리 탐진안씨 종택 52_김정권의 의령이야기 배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보성전문에 입학했다가 곧이어 양정의숙으 로 옮겨 신학문에 열중했다. 그는 교남향우회를 만들어 조직적인 학 생운동을 주도하는 한편 선배와 유지들을 설득해 1907년 동래 구포에 구명학교를, 의령에 의신학교를 설립하고 이듬해에는 고향 설뫼 마을 에 창남학교를 세워 민중 계몽 운동과 함께 인재 양성에도 주력하 였다. 1909년 보다 적극적인 구국 운동의 절실함을 깨달은 백산은 이원 식, 서상일, 윤세복 등 동지 80여 명을 규합하여 비밀 청년 결사인 대 동청년당을 조직하였는데 이들은 광복까지 일제에 발각되지 않고 국 내의 독립운동을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1910년 마침내 강제병합조약 체결이라는 경술국치에 직면한 백산은 이듬해 단신으로 두만강을 건 너 블라디보스톡, 모스크바, 만주 등을 떠돌며 애국지사를 찾아다녔 고 안창호, 이갑, 신채호 등 우국지사들과 만나 항일 구국 투쟁 방안 을 수립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독립을 위한 싸움도 결국 경제적 뒷받 침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1914년 국내로 돌아와 부산의 중심가에 백산상회라는 무역회사를 열었다. 고향의 전답 1천 두락을 방매하여 자본금을 마련한 백산은 각 지방 동지들의 힘을 모아 5년이 지난 3.1운동 직후에는 1만석에 해당 하는 1백만원 자본금의 주식회사를 만들어 민족자본을 육성하면서 본 격적으로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기 시작했다. 무역회사를 위장하여 1부 김정권의 의령이야기_53 서울, 대구, 인천, 원산과 만주의 안동, 봉천, 길림 등지에 지점을 열어 서슬 퍼런 일제의 감시와 탄압 아래서도 자금조달과 비밀 연락 의 거점으로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은 독립운동사 전체를 통틀 어서도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백산은 여러 차례 일경에 연 행되어 조사를 받았지만 그때마다 결정적인 혐의 사실이 없어 풀려나 오곤 했다. 그러나 백산무역이 독립운동자금의 공급처라는 것을 눈치 챈 일경은 집요하게 탄압을 계속했고 결국 1927년 백산무역은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평소 국권 회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인재 양성이 중요하다고 강조 해온 백산은 1919년 삼남지방의 유지들을 설득하여 장학회를 설립하 니 기미육영회다. 기미육영회는 당초 몇 사람의 찬동으로 시작하였으 나 백산의 설득과 노력으로 지역 유지들이 계속 참여하여 회원 수가 43명으로 불어났다. 후일 김정설, 이병호, 이제만, 전진한, 문시환, 안호상, 신성모, 이극로 등 쟁쟁한 인사들이 기미육영회의 장학금과 후원으로 구미 등지에 유학하고 돌아와 독립운동의 기둥이 되었으니 백산의 노력은 인재 양성에 있어서도 큰 빛을 발한 것이다. 1931년 대종교에 입교한 백산은 상교를 거쳐 교적 간행 회장으로 선임되고 이후 7년간의 만주 생활이 시작된다. 그는 동포들의 구심점 이 되어 동경성에 발해농장과 발해학교를 설립하고 동포들의 생활 안 정과 2세 교육에 심혈을 쏟았다. 그러던 중 일본 경찰의 고문으로 얻 54_김정권의 의령이야기 은 신병이 화근이 되어 자리에 눕게 된 백산은 치료를 위해 1942년 마 침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해 10월 조선어학회 사건이 터지면서 배 후로 지목된 백산은 만주의 목단강성 경무청에서 찾아온 일경에 의해 병상에서 체포되어 다시 만주 땅으로 끌려갔다. 9개월 동안 무려 70여 회의 혹독한 고문을 당한 백산은 이듬해 빈 사상태의 몸으로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가족들에 의해 병원으로 옮겨 져 치료를 받던 백산은 광복을 이태 앞둔 1943년 음력 8월 3일 향년 59세의 이른 나이에 이국 땅에서“일제의 패망이 목첩에 있으니 나는 비록 조선의 독립을 보지 못하나 너희들은 볼 것이다”라는 말을 남 기고 생을 마감했다. 대한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친 백산은 민족사상의 고취자요, 민족교 육의 선각자요, 민족자본의 육성자요, 민족언론의 선구자였다. 구국 의 화신이 된 그의 육신은 한줌 흙이 되어 고향인 의령군 부림면 입산 리 고산재 뒤에 묻혀 있을지나 그의 정신은 천세만세 우리와 함께 있 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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