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금선의 말하는 수필 23

수필, 소설

박금선의 말하는 수필 23

소하 0 4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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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늑대를 보았다


                     박금선

나는

아홉 살쯤 되었고

동생 미선이는 네 살 터울이니

다섯 살이었다


할아버지 제삿날이었다


가족들은 제사를 지내려

큰집으로 갔다


식구들이

워낙 많으니 큰 집 눈치가 보여 다 데려가지는 못한다


언니

오빠들만 가고

동생 미선이와 나는 집에 남아 있었다


따라가고 싶지만 갈 수가 없었다


큰아버지가

성격이 고약해

자식들 떼 거지로 줄줄 달고 다닌다고

잔소리를 하시기 때문이다


어쩌다

큰집에 생일 밥이나 제삿밥을 먹으러 가면

어머니는 누가 볼까 봐

미안함이 묻어나는

붉은 볼과 바쁜 눈빛으로 우리가 흘린 밥풀떼기 줍기에 바빴다


얼른 한 숟갈 먹이고는

집으로 돌려보냈다


제사를 지낼 때도 순서가 틀리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고함에 올케들은 주눅이 들어 순서를 더 까먹곤 했다


막걸리를

참 좋아하셨고 술을 드시면 큰 목소리에  명치미골의 산재 바위가 흔들거렸다


별명이 경찰이었다


그래도 어머니는 유머와

재치로 큰아버지와 마음이

잘 맞았다


큰아버지가

무서워 큰 집 쪽으로 가지 않고

멀지만, 앞 냇가 쪽으로

뺑 둘러서  가는 때가 많았다


큰아버지 눈에 뜨이면 막걸리

심부름이나 일을 시키기 때문이다


우리 집은

동네 제일 위쪽 끄트머리에 있었다


산이랑 가깝고 외진 곳이었다

밤이 되면

고라니 노루 부엉이

산 짐승 울음소리를

많이 듣고 자랐다


음력

보름 전후였나보다


달이 있어 대낮처럼 환했다


눈이 많이 내려

마루에도 수북이 쌓였다


식구들이

큰집으로 가고 없으니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미선이를 팔에 눕히고  꼭 안고

자려고 하니

마루에 이상한 소리가 났다


너덜너덜 떨어진 문풍지가

이상 야릇한 냄새와 바람을 일으키더니

방문 너머로

큰 그림자가 휙 지나갔다


무서웠지만, 용기를 내어 문구멍 사이로 밖을 내다봤다


개보다 덩치가 큰 짐승이

마루에 쌓인 눈 위로

큰 꼬리를 흔들며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녔다


늑대였다


무서워

철도 나지 않은 동생을 얼른 깨웠다  소리를 지를까 봐 입을 틀어막았다


동생은

작은 문고리  줄을 잡게 하고

나는 큰 문고리  줄을 잡아당겼다


큰 문고리에 달린 끈으로  내 손목을 한 바퀴 두르고

작은 문 돌축을 한 바퀴

뺑 둘러 묶었다


공부는

못했지만 그래도 내 또래

친구들보다 힘이 세고

일머리는 잘 돌아갔다


발톱으로

문 살을 드르륵 긁을 때는


"아, 우린 오늘 제삿날이구나."


"저 짐승한테 잡아 먹혀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이

라고 해 봐야 군데군데 문살이 일그러져

늑대가 으르렁하고

달려들면 단번에

부서질 거라 생각이 들었다


한 번을

긁고는 더 긁지는 않았다


식구들이 올 때까지

있는 힘을 다해

문고리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하품을 하며

졸고 있는 동생의 살을 꼬집어

잠을 깨우기도 했다


추운

겨울인데도 땀이 나 물에 빠진 생쥐 같았다


무서워 밖을 내다볼 용기도 나지 않았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식구들이 돌아왔다


그때야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짐승 생김새를 자세히 말하니

늑대라고 했다


짐승들이

눈이 오면 먹을 게 없으니 배가 고파

민가로 내려온다고 했다


내가

태어나 제일 무섭고  기억에 남는 날이다


지금도

그 늑대가 내 눈을 바라보며

꼬리에 묻은 눈을 털며  방문 앞을 걸어 다니고 있다


그러나 이 글을 쓰다 보니 의문이 생긴다


그때 내가 본 그 늑대가

늑대가 맞을까?


우리나라에 늑대가 멸종된 지

오래되었다고 한다


일제시대 이후로는 늑대가

없었다고 한다


내가 본 건 늑대가 아니었을까?


몇십 년을 '나는 늑대를 봤다' 고

자랑하며

떠벌리고 다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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